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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리 미용실의 네버앤딩 스토리

박현숙, 『해리 미용실의 네버엔딩 스토리』, 자음과모음, 2014. - 언젠가 딸아이에게 선물로 사준 책을, 딸은 바로 읽지 않고 얼마쯤 묵혀 두었다가 읽고는 다시 내게 내밀었다. 내가 읽지 않은 걸 알고 재밌다며 건넨 것인데 나 또한 얼마쯤 묵혀 두었다가 뒤늦게 읽는다. 재밌다. 중3 나이쯤 되는, 주인공 태산이는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사고로 돌아가신다. 아버지의 유품 상자엔 사진 한 장이 나온다. 해리 미용실 간판을 단 사진 뒷면, 태산이한테 그곳 미용실을 찾아가라는 당부가 한 줄 적혀 있다. 사진 한 장은 슬픔 속에서 여행 기분을 내고 모험 기분을 내는 단초가 되고, 해리 미용실의 정체는 조금씩 비밀을 벗기 시작한다. 소설 제목으로 차용된 (김태원 작사 작곡, 부활 노래)의 말뜻 그대로 이야기가..

감상글(책) 2023.04.01

반곡지에서

반곡지에서 / 이동훈 밤나무에 옷을 걸어두고 원효를 낳았다는 터, 제석사를 삼각형 꼭지에 두면 변의 끝점에 설총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반룡사가 있고 맞은편 끝점에 원효의 본가 터, 초개사가 있다. 그 초개사 가는 길에 반곡지* 있으니 어쩌면 원효가 여기 앉아 세속의 사랑과 인연에 도리머리하다가 떠났을 테고 아버지 흔적을 찾아온 설총이 더워진 가슴을 산바람에 식힌 후에야 일어섰을 테다. 원효와 설총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그 자리에 왕버들이 드레드레 앉아 있다. 뿌리에 가까운 밑동은 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틀려서 주름이 깊다. 추위로 깡깡 얼어붙은 날에도 가물어 바싹 말라붙은 날에도 뿌리 끝, 저 아래의 물기를 악착같이 끌어당긴 그간의 고투가 몸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도 바로서지 ..

메기 / 최란주

메기 / 최란주 아버지 검은 장화를 신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아직 덜 피어난 버들강아지 굼실굼실 시린 허리를 비틀 때 둥근 머리 큰 입가에 수염이 달린 길고 느린 속도가 미끄덩한 돌멩이 사이를 지나간다 보름을 앓아 밥알이 소태 같다는 어머니가 꼭 먹고 싶다는 메기매운탕 걱정 말라며 큰소리치고 나온 터 아버지가 물속 깊이 손을 넣어 꼬리를 잡으니 미끄러운 몸통이 손가락 사이로 재빠르게 빠져나간다 다시 몸통을 잡으려고 허리를 구부린다 됐다, 하는 순간 메기는 몸통을 감싼 손가락을 밀쳐내고 둥글게 허리를 꼬았다 펼치며 온 우주에 찬물 한 방울 튕겨놓더니 처음 태어났던 그곳으로 다시 사라진다 찬물 속 돌멩이가 장화 바닥을 밀어내자 기다렸다는 듯 차가운 물주먹들이 아버지의 몸을 풍덩, 잡아당긴다 또다시 일어나 메기..

감상글(시) 2023.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