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716

반반의 묵죽 / 김윤현

반반의 묵죽 / 김윤현 속을 비워 그럴까 어지러이 부는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 여백은 또 그걸 알고 흔적도 없이 세상으로 내보낸다 그려서 반, 그리지 않아서 반 오오, 반반의 극치여! 나는 아직도 대나무를 그리는 데만 급급하니 그 언제 반반한 묵죽도 한 점 제대로 그릴 수 있으려나 -『반대편으로 걷고 싶을 때가 있다』, 한티재, 2022. 감상- 근자에 ‘칼보다 푸른 기개’란 표제로 천석 박근술 회고전이 있었지만 아쉽게 놓쳤다. 먹만 가지곤 푸른색을 내지 못하겠지만 대나무의 속성과 그걸 담아냈을 묵죽도의 모습을 잘 반영한 제목이란 생각이 든다. 김윤현 시인이 보았을 “어지러이 부는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도 그런 기개를 표상하고 있다. 대나무가 꺾이지 않는 것은 속이 꽉 차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감상글(시) 2023.05.29

겉절이 / 권상진

겉절이 / 권상진 어느 현장에서 품을 팔았는지 낡은 봉고차가 식당 앞에 한 무더기 일당쟁이를 부려 놓는다 땅거미가 하루의 노동에서 건져낸 저들을 척척 국숫집 의자에 걸쳐 놓으면 시멘트 바닥으로 주르륵 흐르는 노을 하얀 거품을 저녁의 가장자리로 밀어내며 국수가 삶아지는 동안 그들은 종일 다져 온 양념으로 서로를 버무린다 잘근잘근, 오늘의 기분을 씹으며 겉절이 한 잎을 반으로 찢는다 너무 길거나 폭이 넓은 슬픔은 적당한 어디쯤에 젓가락을 쑤셔 넣고 주욱 찢어야 비로소 먹기에 알맞은 크기가 된다 반쯤 숨이 죽은 채 하루가 치대는 대로 몸을 맡겼다가 국수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 아직은 어디에라도 곁들여지고 싶은 절여진 겉들 ㅡ『노을 쪽에서 온 사람』, 걷는사람, 2023. 감상 – 봉고차에서 노을 쪽 식당으로 부..

감상글(시) 2023.05.20

복수 / 여영현

복수 / 여영현 어릴 적 옆집에 용구가 살았다 풀빵 장사 하는 제 엄마를 돕는다고 학교도 자주 빠졌다 붕어빵에 든 달콤한 팥처럼 노릇노릇한 해가 기울면 용구는 제 엄마의 리어카를 끌며 다가왔다 그 친구는 소아마비를 앓았는데, 노을은 다정해서 좀 슬프다고 했다 가난의 색상이 있다는 걸 나도 알았지만 침묵했다 그런 용구가 병원에 실려 갔다 붕어빵을 뒤집는 갈고리를 만들다가 한쪽 눈을 잃었다 친구야, 철 심이 탁 하고 튀더니 앞이 환하더라, 우리가 빨아먹던 샐비어처럼 세상이 빨갰어. 용구는 제 엄마가 죽고 나서도 혼자 붕어빵 장사를 했다 밑천 없는 노동으로 더 가난해졌다 한데 이상한 건 붕어빵을 뒤집을 때마다 갈고리로 꼭 눈을 찍더라, 이젠 용구도 없다 교통사고였는데 죽어서도 한쪽 눈을 감지 않았다고 들었다...

감상글(시) 2023.05.11

우산들 / 박지우

우산들 / 박지우 비는 모든 존재의 키를 키운다지 어쩌면 인간의 내면으로 파고들기 위해 내리는지도 몰라 꽃을 탐하는 비의 건널목으로 산란하는 우산 하나, 둘 그리고 우산 셋 물비린내 날리는 여자가 위태롭게 걸어간다 화려하게 치장한 나비처럼 알록달록 동그랗고 투명한 얼굴들 목줄 풀린 개가 미끄러지듯 달려간다 울퉁불퉁 휘청거리는 비, 당신을 잃어버리겠어요 나, 비, 나비를 꿈꾸는 노랗고 빨간 지느러미 비의 몸뚱이들 후드득 후드득 앞다투어 뛰어내리는 오독의 문자들 백색소음에 출근길이 저만치 달아난다 - 『우산들』, 한국문연, 2022. 감상 – 박지우 시인의 고향은 옥천이고 현재 부천에 거주한다. 옥천은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다. 정지용은 부천 소사동에서 이삼 년 거주한 기록이 있어 시인은 더욱 친밀감을 느꼈겠..

감상글(시) 2023.05.07

복로방(福爐房) / 여상현

복로방(福爐房) / 여상현 고린 자반 토막 퀴퀴한 길목짝 저마다 고달픈 노염인 양 뿜어대는 자욱한 담배연기 복로방 유난히 낮은 천정이 지친 나그네들의 가슴을 누른다 자꾸만 흐려지는 남포등 심지 돋구며 돋구며 갈(渴)한 하품 속에 다시금 내일의 이정(里程)을 헤아리며 감발을 푼다 돌아앉아서 부스럭대던 웬 중년 나그네 은전(銀錢) 소리를 내고 저 혼자 놀라 주춤하고 수잠을 자던 황아장수 영감도 덩달아 놀란다 목침을 못 벤 불평은 초저녁부터 코들이 들고 일어났고 「감돌」을 꺼내 보이며 입심껏 떠들던 영감님 긁적긁적 샤쓰 밑에서 금을 파는 게다 「대한독립」을 이러니저러니 큰 기침 섞어가며 떠들던 노인도 상노아이 못 데리고 온 것이 무척 뉘우치는 듯 안절부절못하다가 새우잠이 들었다 죽창(竹窓)을 밝히는 뜰 앞 장..

감상글(시) 2023.04.27

우리 동네 이야기 / 김석규

우리 동네 이야기 / 김석규 마흔 해 훌쩍 넘도록 살고 있는 동네 안면 터서 수인사하고 호형호제하던 사람들 이제는 눈 닦고 찾아보아도 없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마저 끊어진 지 오래 엎어지면 코 닿는 자리의 가게도 문을 닫았다. 늘 헐빈하게 비어 다니는 버스 타고 내리던 사람들 지키는 연쇄점 이젠 방수나 집수리 한다는 간판으로 바꿔달고 귀밑머리 새파란 새댁이 열었던 분식집 한 평이 채 될까 말까한 비좁은 곳 라면 국수 김밥도 말아 팔고 비 구죽죽이 오는 날은 노인네들 모여 정구지전 부쳐 막걸리로 주전부리도 했는데 문 닫고 어디로 갔는지 소식조차 감감하고 속절없이 물기 다 날아가버린 장작개비로 마흔 해 넘겨가면서 살고 있는 동네 -『눈』, 태산, 2023. 감상 – 시집 뒤편에 기록된 김석규 시인의 시집 권수..

감상글(시) 2023.04.18

겨울의 집

겨울의 집 / 김정수 겨울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알고 있지 허공에 창을 내고 소리 소문으로 드나들지 온기 없는 지상은 불타는 나무가 지키고 있지 그냥 만년설이지 문밖에 발 디딘 적 없는 불안이 얼음 침대에 누워 잠을 자거나 책을 읽지 피아노의 책장에서 부유한 숲을 잃어버린 마녀가 갑자기 튀어나와 달빛을 끄기도 하지 세상은 깜깜하게 투명하지 거꾸로 매달린 시계에서 꼬리별이 파닥거리다 숨이 멎지 순간 탐스럽지 사철, 우울 드리운 방에 커튼의 종말이 찾아오기도 하지 봄은 이불 속에 발을 집어넣었다 확 달아나 버리지 어쩌다 외출이 길 잃은 척 말을 걸기도 하지 침묵이 혼자 대답하지 녹색고지서가 배달된 날에는 북금곰이 쓰레기통을 뒤지지 그런 밤이면 죽음이 두툼한 외투를 구름에 매장하지 좌불안석이 내장된 의자엔 자..

감상글(시) 2023.04.11

메기 / 최란주

메기 / 최란주 아버지 검은 장화를 신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아직 덜 피어난 버들강아지 굼실굼실 시린 허리를 비틀 때 둥근 머리 큰 입가에 수염이 달린 길고 느린 속도가 미끄덩한 돌멩이 사이를 지나간다 보름을 앓아 밥알이 소태 같다는 어머니가 꼭 먹고 싶다는 메기매운탕 걱정 말라며 큰소리치고 나온 터 아버지가 물속 깊이 손을 넣어 꼬리를 잡으니 미끄러운 몸통이 손가락 사이로 재빠르게 빠져나간다 다시 몸통을 잡으려고 허리를 구부린다 됐다, 하는 순간 메기는 몸통을 감싼 손가락을 밀쳐내고 둥글게 허리를 꼬았다 펼치며 온 우주에 찬물 한 방울 튕겨놓더니 처음 태어났던 그곳으로 다시 사라진다 찬물 속 돌멩이가 장화 바닥을 밀어내자 기다렸다는 듯 차가운 물주먹들이 아버지의 몸을 풍덩, 잡아당긴다 또다시 일어나 메기..

감상글(시) 2023.03.28

아방가르드 / 권수진

아방가르드 / 권수진 혁명은 멀고 술은 가까워 익숙한 자리에서 발목을 자주 접질렀다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은 지 엊그제 같은데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은 내 일이 아니었으므로 아직 세상에 도래하지 않았다 여기서 딱 한 잔만 더 마시자며 술을 부추기는 친구 조언을 묵살하는 밤 방황이 이토록 긴 줄 알았다면 남들처럼 적당히 선에서 타협하는 인생을 살아야 했다 사랑은 여전히 어렵고 명멸하는 별빛 속에 북극성과 카시오페이아를 자주 혼동하곤 했다 삶이란 술 취한 회전목마 같아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가끔 버거울 때가 있다 아무런 줏대 없이 자꾸 2차를 권하는 무리에 휩쓸려 집은 점점 멀어지고 길은 점차 사라지고 막차 떠난 정거장을 한참 동안 서성인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면 아무래도 이번 생의 ..

감상글(시) 2023.03.26

시인학교 / 오탁번

시인학교 / 오탁번 소월이나 미당 생각하면 시 쓸 맛 영 안나겠지만 재주는 좀 없어도 꾸준하게 쓰고 또 쓰다 보면 내신 1등급 5% 안에는 들지 몰라 1등 2등 다툴 만한 고은이나 김춘수가 사람이다 말씀이다 하면서 3등급쯤으로 자진해서 나가는 걸 보면 너희들 흰소리 작작 하고 이슬비 맞으며 홀로 울면서 빗방울 찍어서 손바닥에라도 가련한 시 몇 줄 쓰고 또 쓰면 지용쯤은 친구 삼아도 되지 않을까? 박용래하고는 맞술 나눠도 큰 흉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내신성적이 뭐 대순가 실기시험으로 결판이 나는 거야 이 잡지 저 잡지로 너비뛰기 평론가 대학교수까지 높이뛰기 모든 욕 먹으며 오래달리기 심사위원 알음알음 턱걸이 하기 이쯤되면 소월이나 미당도 뒷발질로 넘어뜨리고 현대시사의 주동인물이 될 수도 있것다? (학생..

감상글(시) 2023.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