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716

신석초와 이육사의 「파초」

신석초와 이육사의 「파초」 / 이동훈 신석초(1908-1975)는 충청도 서천 출신으로 석북 신광하의 7세손이다. 1935년, 스승으로 따르던 위당 정인보(1893-1950) 집에서 네 살 위인 이육사(1904-1944)와 인사하고 바로 지기가 된 두 사람은 이육사가 북경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각별한 우정을 나눈다. 경상도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세손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고향집을 번갈아 방문하고 부여와 경주를 함께 여행하기도 한다. 근래, 이육사 문학관이 주도한 이육사의 육필 전시에서 신석초에게 보내는 네 편의 엽서가 전시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파초에 관한 시편을 한 편씩 남겼는데, 신석초의 시에 ‘육사에게’란 부제가 붙어 있고 발표 시기가 먼저인 걸로 보아 이육사의 시는 이에 대..

감상글(시) 2022.09.20

신석초와 이육사의 「파초」

신석초와 이육사의 「파초」 / 이동훈 신석초(1908-1975)는 충청도 서천 출신으로 석북 신광하의 7세손이다. 1935년, 스승으로 따르던 위당 정인보(1893-1950) 집에서 네 살 위인 이육사(1904-1944)와 인사하고 바로 지기가 된 두 사람은 이육사가 북경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각별한 우정을 나눈다. 경상도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세손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고향집을 번갈아 방문하고 부여와 경주를 함께 여행하기도 한다. 근래, 이육사 문학관이 주도한 이육사의 육필 전시에서 신석초에게 보내는 네 편의 엽서가 전시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파초에 관한 시편을 한 편씩 남겼는데, 신석초의 시에 ‘육사에게’란 부제가 붙어 있고 발표 시기가 먼저인 걸로 보아 이육사의 시는 이에 대..

감상글(시) 2022.09.18

성(城) / 구자운

성(城) / 구자운 우리들은 줄곧 성을 찾아왔다. 우리들의 성은 허지만 큰거리에서 별로 멀진 않다. 그것은 숯검정 낀 부엌의 기름내 자오록한 텅 빈 걸상이 널리운, 뒷골목의 목로 술집이니까. 우리들은 어느 때보다 일찌감치 안방을 차지하였다. 이렇듯 먼지 이는 날씨엔 목구멍이 컬컬해진다. 우리들은 술을 기울여 다시금 탄약에 불을 붙였다. 종이 바른 벽을 뚫고서 포탄이 뛰쳐나갔다. 거리는 조용하여 참새 새끼 한 마리도 없다. 오후의 햇살에 눈 녹은 고드름이 빛나고 있다. 우리들의 악당은 사뭇 여러 방향에서 솟아나온다. 그것은 우리들의 탄환으로 하나하나 거꾸러진다. 어떤 악당은 한창 용감히 덤벼든다. 아주 권력이 있는 것인 양, 하지만 술에 빠져 떠내려가는 것이 이런 치들이다. 어떤 악당은 좀 경망한 주제에 ..

감상글(시) 2022.08.28

촐촐하다 / 홍해리

촐촐하다 / 홍해리 깊은 겨울밤 잠 오지 않아 뒤척이는데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 누가 술상이라도 보는가 생각은 벌써 술잔에서 촐촐 넘치고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는지 곁엔 잠에 빠진 아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마음이 지워지다』, 놀북, 2021. 감상 : 홍해리 시인은 치매에 이른 아내를 옆에서 돌보면서, 일종의 간병기(看病記)와 같은 421편의 시를 네 권의 시집으로 묶어서 출간한 바 있다. 홍해리 시인에게 시 쓰는 일은 평생을 밥 먹듯이 숨 쉬듯이 해온 일이기도 했지만, 치매행 관련 시집은 치매 가족이나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한 땀 한 땀 깁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육필 시다. 『마음이 지워지다』는 기존의 네 권 시집에서 출판사 놀북이 가려 뽑..

감상글(시) 2022.08.21

귀향 / 조세림

귀향 / 조세림 팔월달 이랑진 바다 위로 산악(山岳) 같은 배는 비트적비트적 육중한 몸을 옮긴다 손들면 만저질 듯 함폭 내려앉은 하늘 한여름 따가운 햇살이 이글이글 뱃전에 흐르고 저 멀리 대륙의 변두리를 스쳐온 바닷바람에 머리칼은 하늘에 대고 넥타이는 깃발처럼 펄럭인다 담배도 사랑도 오늘은 시들하다 눈초리를 저기 아득한 수평선 위에 던지고 팔짱을 끼니 가슴속 설레는 피의 파도 귀에 아련히 들릴 듯싶다 고향 떠난 지 십 년째… 옛 그날 내 양자(樣姿) 그려 고요히 눈감으니 떠오르는 건 몹시도 여위어진 고향의 얼굴 문득 황소처럼 소리쳐 울고 싶구나 -『세림 시집』(시원사, 1938) /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선우미디어, 2000) 감상 – 영양 주실마을 동구 숲엔 조지훈 시비와 함께 조세림(본명..

감상글(시) 2022.08.11

시인들의 술상 / 김완

시인들의 술상 / 김완 시인들의 술상이 너무 고급이다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안주에서는 기름지고 뚱뚱한 시가 나오기 마련 한 그릇 국밥에 맑은 영혼을 말아 깍두기 한 접시 된장에 찍어 먹는 양파, 매운 고추면 만족해야 하리 피와 땀과 눈물에 경배하며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는 정신으로 푸른 하늘의 자유를 노래해야 하리 이 세상의 온갖 상처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 병 소주 한 병이면 족해야 하리 지상의 낮고 어두운 곳까지 내려가 아물지 않는 상처에서 희망의 꽃 다시 피울 그날까지 기다려야 하리 선악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일수록 허기가 정신을 맑게 한다는 말 온몸에, 뜨거운 가슴에 새겨야 하리 『지상의 말들』, 천년의시작, 2022. 감상 – 온몸으로 밀고 나가서 시를 쓸 것을 주문하면서,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감상글(시) 2022.08.05

반려 / 노천명

반려(斑驢) / 노천명 도무지 길들일 수 없는 내 나귀일레 오늘도 등을 쓸어주며 노여운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너와 함께 가야 한다지…… 밤이면 우는 네 울음을 듣는다. 내 마음을 받을 수 없는 네 슬픈 성격을 나도 운다. - 『산호림』(1938) / 『사슴의 노래 - 노천명 전 시집』, 스타북스, 2020 감상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노천명의 「사슴」은 한때 시인의 자화상을 얘기하는 걸로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근래, 시인 백석과의 교류가 알려지고 1936년 “한 개의 포탄”(김기림의 말)처럼 등장한 백석의 시집 제목이 『사슴』인 게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거라는 짐작이 있었다. 여기에 당대 모윤숙, 최정희, 노천명으로부터 백석이 사슴으로 불리던 편지 등이 공개되면서 사슴의 주..

감상글(시) 2022.07.27

집밥 / 권상진

집밥 / 권상진 혼자 먹는 밥은 해결의 대상이다 두어 바퀴째 식당가를 돌다가 알게 된 사실은 돈보다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 매일 드나들지만 언제나 마뜩찮은 맛집 골목을 막차처럼 빈속으로 돌아나올 때 아이와 아내가 먹고 남은 밥과 김치 몇 조각에 나는 낯선 식구이지나 않을는지 늦을 거면 밥은 해결하고 오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걱정인지 짜증인지 가로수 꽃점이라도 쳐보고 싶은 저녁 불편한 약속처럼 나를 기다리는 골목 분식집 연속극을 보다가 반갑게 일어서는 저이도 누군가의 아내이겠다 싶어 손쉬운 라면 한 그릇에 아내와 여주인을 해결하고 나면 어느새 든든해 오는 마음 한편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구내식당 저녁 내내 간절하던 집밥은 그래, 쉬는 날 먹으면 된다 -『눈물 이후』, 시산맥, 2018. 감상 – 삼대..

감상글(시) 2022.07.02

몽상가의 턱 / 김혜천

몽상가의 턱 / 김혜천 인사동 골목길을 걷다가 고미술품 노점상에서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아 비스듬히 턱을 괸 몽중사유상을 모셔왔다 몽상은 오직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뇌에 자극을 주어 유연하게 한다 굳어버린 일상 속에서 저 아래 먹이를 낚아채는 매의 세계를 보게 한다 간단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넘어 내 창에 걸터앉은 그대여 나를 바람 되게 하여 산을 날게 하고 바다를 걷게 하고 달을 베어 먹게 하고 꽃 이파리와 입맞춤하게 하고 고뇌하고 절망하였다가 다시 살아 시공을 넘나들게 하여 새로운 우주를 도모하게 하면서 몽(夢) 중에도 찾아와 내 영혼을 깨우는 그대여 나 이제 사는 날까지 그대 맞는 마중물 자리끼 놓아두려오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 시산맥, 2022. 감상 – 손으로 ..

감상글(시) 2022.06.25

고춧가루 / 조한수

고춧가루 / 조한수 가을이 마당에 내려앉은 어느 날 조상님들 묘 이장 보상금 신청을 위해 고향인 밀양 당숙 집에 갔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나는 당숙을 부모로 생각했으며 당숙께서도 집안의 종손인 나를 끔찍이 생각해 주셨다 밀양에 나노복합융합 단지가 건설되면서 생활 터전 모두를 잃게 되었으며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농사일을 놓지 않으셨던 당숙 이제 보상금 받아 딸들이 사는 진해로 이사 간다고 하셨다 묘 이장 보상금 신청을 마치고 집으로 모셔다드리니 까만 비닐봉지에 고춧가루 다섯 근을 이중, 삼중으로 포장하여 주시며 ‘이 고춧가루가 이제 마지막이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나는 ‘땡초 고춧가루는 아니지예?’하며 딴청을 피웠다 올해 김장김치는 엄청 매울 것 같다. -『애인』, 홍두깨, 202..

감상글(시) 2022.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