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716

길을 위하여 / 이수

길을 위하여 / 이수 꽃 진 라일락 가지가 드리우는 그늘 아래 앉아 공원 내 음악방송에 귀 기울여 보기도 하며 머언 거리에서 서성거릴 피멍 든 내 삶의 경골의 구둣소리를 듣는다 세상 속 어떠한 절망도 사람을 끝장 낼 수는 없다고 중얼대며 가는 길 위에서 따가운 오월의 햇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 잠시 바라보면, 등성이로 구름을 몰아가는 바람의 귀엣말 같은 돌돌거림 바윗길 옆, 오두마니 앉아 있는 내 표정에서 얼른 슬픔을 읽어 내지 못한 사람들은 셔츠 앞자락을 펄럭이며 저만치 앞서 가 버리고 백련암 오르는 길 옆, 바위틈마다 촘촘히 박힌 날개이끼들을 밟을 새라 조심하며 나는 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길고도 먼 길, 나는 이 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피로와 숨가쁨이야말로 이미 능선을 타고 오르..

감상글(시) 2023.02.23

한 잎의 女子 / 오규원

한 잎의 女子 / 오규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사, 1978. 감상 - 이 시로 말미암아 물푸..

감상글(시) 2023.02.17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생각 / 우남정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생각 / 우남정 책꽂이를 또 하나 사야 할까 표지를 보고 목차를 훑고, 책상 위에 책이 쌓여 간다 그 위에 또 그 위에 해가 지고 저녁이 오고 나는 침침해졌다 읽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책을 책꽂이로 옮긴다 또 쌓인다 읽다 만 책들이 늘어 간다 다시 읽고 싶은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붙인다 행간의 어디쯤에서 길을 잃는다 접어 놓은 모서리에 쥐가 난다 책 제목이 버킷 리스트처럼 줄지어 꽂혀 있다 『백년의 고독』을 다시 읽을 확률은 얼마일까 수십 년 한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매일 읽어도 어렵다 정독한 척하지만 대부분은 오독이다 시집 속에서 시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시인의 이름에 포스트잇을 붙인다 수박은 없고 수박 겉핥기가 있다 빠르게 스쳐 가는 것들, 눈 맞출 사이 없이 꽃이 진다 책을 버..

감상글(시) 2023.02.13

살구 / 민구식

살구 / 민구식 살구나무 집 손 씨 할매 마루 끝에 앉아 꽃비 바라본다 저 나무 심을 때 둘째 딸 낳고 시아버지가 심심해하면서 심은 건데 내리 셋이나 더 딸을 낳으니 그만 뽑아 버리려는 것을 큰딸이 매달리고 말려서 살아 있는 것이라고 씁쓸히 웃으신다 그 딸이 시집을 가서 또 딸만 셋이여 ‘삼 일만 살구〜’라고 해서 살구꽃이라든가 ‘삼 년만 살자’고 해서 살구꽃이라든가 눈 한번 잘못 돌리면 꽃구경도 못 하는 살구꽃은 여우비 내리듯 우산 펼까 말까 하다가 지고 마는 절정이 짧다 떨어진 것들만 주워 먹는 살구는 열매마다 멍든 상처가 깊다 기구한 팔자가 살구꽃 같다면서 “내년에도 내가 살구꽃 볼려나〜” 살구 팔자 같은 할매 한숨이 길다 -『자벌레의 성지』, 시산맥사, 2022. 감상 – 살구나무를 뜻하는 한자어..

감상글(시) 2023.02.08

흔적 / 조문환

흔적 / 조문환 조선희 선생이 다녀가셨다 생전 동생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나라는데 날 보면 동생이 잡힐 것 같다고 하면서 우두커니 그 말만 하고서는 한동안 쳐다만 보셨는데 내 얼굴에 동생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을 리 만무한데 단 한 번 아침 식사 자리에서 동생을 뵈었을 뿐인데 얼마나 그 마음 잡을 길 없었으면 단 한 번 밥 자리에서 만난 나를 보러 오셨을까? 내 눈망울에 동생 그림자라도 남아 있어 그 걸음 헛되지 말아야 할 텐데 떠난 뒷모습에 오히려 동생의 모습이 서려있는데 - 『시위를 당기다』, 학이사, 2022. 감상 – 흔히 인용하는 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의 첫 번째는 ‘부모구존 형제무고(父母俱存 兄弟無故)’다. 부모형제가 안녕하고 그로 인해 가정과 일신이 평화로운 것은 큰 즐거움이다. 하지만 ..

감상글(시) 2023.01.31

고양이 봄 / 김윤삼

고양이 봄 / 김윤삼 고양이 울음소리에 살금살금 걷는 발걸음 장산곶매 깃털보다 얼마나 가벼운지 돌아서다 흠칫, 사뿐사뿐 홀로 퍼 올리고 언제 오나 언제 오나 하다가 찬 서리 밑에 깔린 산돌림에 화들짝 놀라 맵디매운 2월 매화 나뭇가지 위 발가벗은 채 홀로 핍니다 눅진눅진한 농성장 대오 빨랫줄 가는 빗방울 톡톡 튀자 고양이 봄도 톡톡 웃음을 뱉습니다 * 산돌림: 옮겨 다니면서 내리는 소나기. -『붉은색 옷을 입고 간다』, 삶창, 2022. 감상 – 매년 2월이면 남쪽으로부터 매화 소식이 전해진다. 매화 벙그는 장면은 아름다워도 그 과정은 지난하다. 봄 기척에 일찍 꽃망울을 틔우려던 매실나무가 혹한에 다시 얼어붙기 일쑤다. 그런 중에도 봄은 오고 있다. 소나기가 지나고 잠시 방심하는 사이, 고양이 발걸음처럼..

감상글(시) 2023.01.30

두더지 / 이병각

두더지 / 이병각 할망이는 두더지를 산 채로 붙들었다. 모가지를 노끈으로 홀쳐 가지고 이십 리나 먼 땡볕 길을 더듬어 서울에 들어왔다. 삶아 짠 산나물 몇 죄기를* 길거리에 편 다음 산나물을 사든지 두더지를 사든지 또는 두 가지를 다 사든지 마음대로 해보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오정(午正) 부는 소리도 벌써 한 나절 지나고 나니 사람들은 점심을 치른 기운으로 걸음을 빨리 걷기만 하고 두더지와 산나물은 돌아다보려는 기척도 없었다. 두더지는 할망이보다 훨씬 빨리 지쳐서 기운 하나 없이 착 늘어졌는데 햇볕을 본 덕으로 눈이 까져버려서 비위가 틀리지는 안 했으려나, 할망이는 요기할 생각이 나지 않은가 궁금하였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 할망이 산나물 두더지 셋이서 모두 집 생각이 간절하였다. * 죄기를 : 산나물..

감상글(시) 2023.01.27

친구들 / 이승욱

친구들 / 이승욱 O 별명은 까마귀 바둑을 잘 두었다. D는 철학자 근엄한 두 개의 안경알 속이 늘 불안했다. I는 가난한 휴머니스트 봄에 핀 무꽃 같은 그의 삶에는 늘 눈물이 감돌았다. 나는 몽상가 절망을 사르던 반란의 불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저가 싫어서 저와는 다른 세상을 좇아 달아났다. 부도덕한 시의 이름으로 합쳤던 위대한 도당들, 소주가 헐한 포장집에서 그들과 나는 낮술에 취하고 씌어지지 않는 시는 없다고 하였다. 씌어진 시들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남은 심심한 날 우리는 모두 어중간한 시를 썼다. 이제 그 지겨운 추억의 자리에 남은 사람은 없다. 이제 그 두려운 시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지금도 텃밭에 무꽃은 피고 지금도 교정의 분수는 물보라를 끓이고 지금도 낮술에 취한 ..

감상글(시) 2023.01.23

골목 안 국밥집 / 엄원태

골목 안 국밥집 / 엄원태 골목 안의 그 식당은 언제나 조용했다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언제나 방안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느릿느릿 차려주는 쟁반 밥상을 나는 수배자처럼 은밀히 찾아들어 먹곤 했다 밥을 기다리는 잠시 동안의 그 적요가 왠지 나는 싫지 않았다 한번은 직장 동료와 같이 간 적이 있는데 을씨년스레 식은 드럼통 목로들을 둘러보며 그가 추운 듯 그 적요를 어색해하는 것을 보곤 이후 죽 혼자만 다녔다 가끔씩 국이 너무 졸아들어 짜진 것을 빼고는 콘크리트처럼 딱딱한 채 언제나 적당히 젖어 있던 그 식당의 쓸쓸한 흙바닥까지 나는 사랑하였다 그 식당이 결국 문을 닫고 아이와 함께 늘 어두운 방안에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어디론가 떠나버린 뒤, 집수리가 시작된 철거 현장에서 나는 어린 딸아이의 끊임없는..

감상글(시) 2023.01.10

핑퐁게임 / 이환

핑퐁게임 / 이환 공은 함부로 날뛰는 짐승 같아서 성질머리를 살살 달래주어야 한다 저돌적으로 날아온 공을 되받아 후려친다면 빗나가기 십상 이럴 땐 포물선을 그리듯 부드럽게 넘겨줘야 한다 아무 때나 라켓을 휘두르는 건 하수나 하는 일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슬쩍 커트만 찔러줘도 된다 있는 힘껏 스매시를 날리거나 과감한 드라이브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도 때론 필요하다 고수의 테크닉이란 그런 것 공을 갖고 놀 줄 알아야 한다 변화와 코스를 생각하며 포핸드와 백핸드로 요리할 줄 알아야 한다 공은 나의 허점을 집요하게 공략한다 비틀거리는 순간 금방 알아차린다 항상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 승패를 가리는 게임의 세계에서 막판엔 누구나 한방에 주저앉는다 한방에 메달을 거머쥐는 자가 있고 한방에 낙향하는 자가 있다 뼈..

감상글(시) 202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