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716

눈 오는 저녁 / 김소월

눈 오는 저녁 / 김소월 바람 자는 이 저녁 흰눈은 퍼붓는데 무엇하고 계시노 같은 저녁 금년은…… 꿈이라도 꾸며는! 잠들면 만날런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눈 타고 오시네. 저녁 때, 흰눈은 퍼부어라. 『진달래꽃』, 매문사, 1925. / 『김소월 시전집』(권영민, 2007) 감상 : 김소월 시인(1902〜1934)의 『진달래꽃』은 문화재로 등재된 시집이다. 시집 속 127편의 시 중에 절반 이상이 노래로 불릴 정도로 축복 받은 시인이지만 당사자는 알지 못한다. 「눈 오는 저녁」도 여러 곡이 창작되고 있는 중에 백순진이 곡을 붙이고 박상규가 노래(1972) 부른 것이 오리지널에 가까워 보인다. 1974년, 백순진 본인이 참여한 ‘사월과 오월’에서 다시 부르더니, 1978년 백순진 프로덕션을 통해 음반을 낸..

감상글(시) 2022.12.22

롱롱 파이프 / 이향지

롱롱 파이프 / 이향지 할아버지는 담뱃대로 잎담배를 비벼서 피우셨다 긴 담뱃대 끝 불함지에 잎담배를 꽁꽁 다져 넣고 마루 아래 놋화로에서 잿불을 뒤적거려 담뱃불을 붙이곤 했다 할아버지는 눈뜬장님 할아버지 담뱃대는 롱롱 파이프 어느 날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담배를 피우시다 잎담배 대신 조그만 고모를 불함지에 눌러 넣었다 기분 좋게 담뱃불을 붙여 빨아들이자 연기 대신 조그만 고모가 할아버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할아버지는 목에 걸린 고모를 칵칵 소리 내어 뱉었다 할아버지는 눈뜬장님 할아버지 담뱃대는 롱롱 파이프 난데없이 마당에 떨어진 고모를 안고 할머니는 술도가로 달려가서 큰 독 속에 숨었다 갓 빚은 술이 가득 들어 있는 깊은 항아리 술독에서 건진 할머니는 반신불수가 되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대소변 받아 내..

감상글(시) 2022.12.17

흘러도, 그 장맛 / 이진환

흘러도, 그 장맛 / 이진환 어스름이 든 표정들을 들여다보며 가슴에 동여맨 조바심을 내려놓던 물 한 모금에 늘 열려있는 사립문이야 그렇다 쳐도 하루쯤 건너뛰어도 좋을 하루해를 등짐하고 치워도 어질러진 모습을 한 외진 집 댓돌 위에 좀 오랜 기억과 닮은 신발은 그림자에 닿도록 허리춤을 무너뜨린 억척이고 억장이었습니다. 손끝을 놓지 못하는 어머니의 봄 이른 나물에서 우리는 자라나고 햇살 기댄 담장에서 허기 쫓는 눈빛으로 다투었지만 밥맛 좋고 힘을 쓰는 데는 장맛보다 더한 것이 없다며 담그는 손에 정성이 여간 아니던 붉은 고추에 감스름한 장독을 열어두고 꾹꾹 누른 된장까지 턱 하니 볕에 내어놓으니 만석꾼이 어디 이럴까 아무리 힘든 일 닥쳐도 뭔 걱정이랴 맛나게도 쑥쑥 자라는 새끼들 어디가 깨져 다쳐도 저 된장..

감상글(시) 2022.12.10

미도다방 / 전상렬

미도다방(美都茶房) / 전상렬 종로2가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정인숙 여사가 햇살을 쓸어 모은다 어떤 햇살은 가지 끝에 걸려 있고 어떤 햇살은 서릿발에 앉아 있다 정여사의 치맛자락은 엷은 햇살도 알뜰히 쓸어 모은다 햇살은 햇살끼리 모여 앉아 도란도란 무슨 얘기를 나눈다 꽃시절 나비 얘기도 하고 장마철에 꺾인 상처 얘기도 하고 익어가는 가을 열매 얘기도 하고 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도 추억은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종로2가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풀어 놓고 차 한잔 값의 추억을 판다 가끔 정여사도 끼어들지만 그들은 그들끼리 주고받으면서 한 시대의 시간벌이를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힘』, 나눔문화사, 1995. 감상 – 성곽도시였던 대구는 읍성을 허물고 성곽..

감상글(시) 2022.12.05

가을이 오는 달 / 김현승

가을이 오는 달 / 김현승 구월에 처음 만난 네게서는 나프탈렌 냄새가 풍긴다. 비록 묵은 네 양복이긴 하지만 철을 아는 너의 넥타인 이달의 하늘처럼 고웁다. 그리하여 구월은 가을의 첫 입술을 서늘한 이마에 받는 달. 그리고 생각하는 혼이 처음으로 네 육체 안에 들었을 때와 같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너의 눈은 지금 맑게 빛난다. 이달엔 먼 수평선이 높은 하늘로 서서히 바꾸이고, 뜨거운 햇빛과 꽃들의 피와 살은 단단한 열매 속에 고요히 스며들 것이다. 구월에 사 드는 책은 다 읽지 않는다. 앞으로 밤이 더욱 길어질 터이기에 앞으론 아득한 별들에서 가장 가까운 등불로 우리의 눈은 차츰 옮아 올 것이다. 들려오는 먼 곳의 종소리들도 이제는 더 질문하지 않는다. 이제는 고개 숙여 대답할 때다. 네 무거운 영혼을 ..

감상글(시) 2022.11.30

금강역 / 김수상

금강역 / 김수상 유월의 한낮, 느티나무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네 첼란의 돌과 속눈썹과 검은 우유와 심장을 생각하네 늦은 당신은 더 늦어도 오지 않고 철길 너머에는 비를 몰고 오는 먹구름 몇 장 비는 다녀가도 당신은 오지 않네 푸른 돌을 매단 느티가 한낮의 흰 이마를 때릴 때 번쩍이는 잎들 거느리고 기차는 지나가네 나는 헌신짝처럼 남겨져 이젠 당신을 쓸 수가 없네 -『물구라는 나무』, ㈜여우난골, 2022. 감상 – 시인이 다녀간 금강역은 대구 금호강(琴湖江) 가의 역사로 보인다. 대구선 구간을 이동해서 2005년 신설된 역이지만 이용자가 많지 않아 현재 여객 업무가 중단된 상황이다. 바람이 종일 머물다 가는 쓸쓸한 이 공간에 변화의 조짐도 있다. 뒤편 금호강과 앞편 연꽃 단지 사이를 잇는 산책로를 조성하..

감상글(시) 2022.11.13

벙어리뻐꾸기 / 문무학

벙어리뻐꾸기 / 문무학 그렇다 차라리 기침 같은 네 울음을 고향 지킨 재종숙의 어눌한 훈계처럼 무안한 얼굴빛으로 대꾸없이 듣나니. 길 잘든 목젖으로도 토해 내지 못하는 골 깊은 원시림의 싱싱한 그 바람으로 한 천 년 세상 거슬러 네가 그리 울어야지. 잃고도 영 모르고 모르며 또 잃어가는 무엇인가 뉘 소중한 소중한 그 무엇인가 네 거친 울음 속에서 깨어나고 있나니. 『설사 슬픔이거나 절망이더라도』, 백상, 1989. 감상 : 뻐꾸기는 영미권에서는 cuckoo [ˈkʊkuː]로 쓰고 발음한다. 새소리가 새 이름이 된 경우다. 뻐꾸기도 마찬가지다. 뻐꾹 뻐국 하는 새소리가 새 이름이 되었다. 똑같은 새소리라 하더라도 언어권마다 새소리를 다르게 적는 건 언어의 자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기도 하다. 뻐꾸기 말..

감상글(시) 2022.10.25

두어 편의 시로 읽어 보는 이상(李箱) / 이동훈

두어 편의 시로 읽어 보는 이상(李箱) / 이동훈 서울 종로구 통인 시장 옆 ‘이상의 집’은 이상(김해경)의 큰아버지댁이다. 세 살 때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 댁에 양자로 보내진 이상(1910-1937)은 보성고보와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 후 총독부 건축과에 취직한다. 화가의 꿈이 있었지만 돈을 벌어야 했다. 출중한 그림 실력은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기록으로 증명되고, 1934년 친구인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신문 삽화를 맡아 그릴 정도였으나 생계보다 시급한 것은 아니었다. 이상은 자신을 돌봐준 양부와 그쪽의 남동생, 가난한 친부의 가계와 두 동생까지 돌봐야 할 의무로 힘겨워했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는 「가정」이다. 시에서 화자는 집으로 좀처럼 들어가지 못한다. 생활이 모..

감상글(시) 2022.10.08

창문 밖이 떠나고 있다 / 최한나

창문 밖이 떠나고 있다 / 최한나 휴일을 타고 자주 떠나는 집들 창문 밖이 덩달아 떠나고 있다. 남아 있는 집들은 아직 새벽잠에 들어 있고 가끔씩 열리던 삼층집 창문만 내려와 담벼락에 기대어 섭섭한 말 몇 마디 보탠다 먼지 날리는 햇살과 사다리차의 배웅을 받으며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무거웠던 안주(安住) 신문지에 싸인 접시들 꽃잎에 싸인 봄은 남겨 두고 꽃 떨어지듯 순식간에 창문 밖이 떠나고 있다 우당탕 탕탕 소음들이 떠나고 있다 충혈된 아침잠이, 꽝 창문 여닫는 소리 엔진음이 지우며 떠난다 아이들은 벽의 낙서처럼 깔깔거리고 컸다면 두고 가는 소문도 있을 것이다 찌그러진 싱크대도 두고 다리 저는 식탁과 서랍장은 재활용 스티커에게 부탁하고 손 흔드는 매캐함만 남겨 두고 떠나는 창문 밖 어색한 얼굴 하나가 창..

감상글(시) 2022.09.28

받침 / 박경한

받침 / 박경한 밤새 자란 수염을 깎는데 입술 언저리에 면도날이 닿지 않는다 입 속 혀가 입 언저리 오목한 부분을 볼록하게 받쳐주어서 면도를 마친다 꽃받침이 꽃을 앉히는 것처럼 책받침이 글씨를 앉히는 것처럼 혀는 말없이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입 속의 혀처럼 나의 앞길을 걱정하며 뒤에서 손전등을 비춰주는 사람이 있었다 뒤에서도 눈부신 사람이 있었다 나도 산밭에 심어둔 오이 지지대처럼 사소한 것들의 받침으로 살다가 목숨을 다한다면 얼마나 싱겁고 좋을까 『풀물 들었네』, 학이사, 2022. 감상- 입안의 혀처럼 군다는 표현은 듣기 좋은 말로 남의 비위를 잘 맞춘다는 부정적 의미로 종종 쓰인다. 말을 유창하게 잘할 것 같으면 혀에 빠다(버터)를 발랐느냐는 식으로 장난 반 부러움 반의 말을 하게 된다. 남..

감상글(시) 2022.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