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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흘러간 내 영혼의 먼길

조지훈, 『흘러간 내 영혼의 먼길』, 문음사, 1977. - 조지훈(1920-1968) 시인 사후에 출간된 산문 모음집이다. 책의 제목 『흘러간 내 영혼의 먼길』은 시인의 시 「낙엽」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전략) 하나 둘 구르는/ 낙엽을 따라// 흘러간 내 영혼의/ 머언 길이여// 바람에 낡아가는/ 고목 등걸에/ 오늘도 하루해가/ 저무는구나”로 마무리되는 시편이다. 인용 수필 중 ‘돌의 미학’은 돌이 가진 추상의 미를 조지훈 시인 자신의 인생과 결부지어 쓴 글이다. 일본 쿄토 묘심사 정원의 돌,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산방에서 일 년 남짓 머물면서 바라본 돌, 경주 토함산 석굴암에서 마주했던 피가 도는 돌, 피난지 대구에서 바라본 집채보다 큰 바윗돌 얘기를 한다. 이후 성북동에 서른세 해를 머물며..

감상글(책) 2023.06.04

반반의 묵죽 / 김윤현

반반의 묵죽 / 김윤현 속을 비워 그럴까 어지러이 부는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 여백은 또 그걸 알고 흔적도 없이 세상으로 내보낸다 그려서 반, 그리지 않아서 반 오오, 반반의 극치여! 나는 아직도 대나무를 그리는 데만 급급하니 그 언제 반반한 묵죽도 한 점 제대로 그릴 수 있으려나 -『반대편으로 걷고 싶을 때가 있다』, 한티재, 2022. 감상- 근자에 ‘칼보다 푸른 기개’란 표제로 천석 박근술 회고전이 있었지만 아쉽게 놓쳤다. 먹만 가지곤 푸른색을 내지 못하겠지만 대나무의 속성과 그걸 담아냈을 묵죽도의 모습을 잘 반영한 제목이란 생각이 든다. 김윤현 시인이 보았을 “어지러이 부는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도 그런 기개를 표상하고 있다. 대나무가 꺾이지 않는 것은 속이 꽉 차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감상글(시) 2023.05.29

<소설>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김연수 역), 『대성당』, 문학동네, 2007. -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모음집. 레이먼드 카버는 1938년 미국 오리건 주에서 가난한 제재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른 결혼에 이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한동안 알콜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시절이 있었다. 마흔에 이르러서 금주에 성공했으나 아내와 헤어졌다. 곧이어 「대성당」(1983) 등으로 문명을 떨치기 시작했으나 1988년 암으로 작고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알콜 의존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소설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 단편 「칸막이 객실」의 마이어스는 이혼 후 혼자 사는 남자다. 8년 만에 아들의 편지를 받고, 아들이 있는 스트라스부르에 갈 생각을 한다. 아들에 대한 기억은 부부싸움 중인 마이어스에게 아들..

감상글(책) 2023.05.21

겉절이 / 권상진

겉절이 / 권상진 어느 현장에서 품을 팔았는지 낡은 봉고차가 식당 앞에 한 무더기 일당쟁이를 부려 놓는다 땅거미가 하루의 노동에서 건져낸 저들을 척척 국숫집 의자에 걸쳐 놓으면 시멘트 바닥으로 주르륵 흐르는 노을 하얀 거품을 저녁의 가장자리로 밀어내며 국수가 삶아지는 동안 그들은 종일 다져 온 양념으로 서로를 버무린다 잘근잘근, 오늘의 기분을 씹으며 겉절이 한 잎을 반으로 찢는다 너무 길거나 폭이 넓은 슬픔은 적당한 어디쯤에 젓가락을 쑤셔 넣고 주욱 찢어야 비로소 먹기에 알맞은 크기가 된다 반쯤 숨이 죽은 채 하루가 치대는 대로 몸을 맡겼다가 국수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 아직은 어디에라도 곁들여지고 싶은 절여진 겉들 ㅡ『노을 쪽에서 온 사람』, 걷는사람, 2023. 감상 – 봉고차에서 노을 쪽 식당으로 부..

감상글(시) 2023.05.20

<에세이> 학교를 떠난 아이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김양식, 『학교를 떠난 아이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학이사, 2023. - 저자는 중고등학교에서 33년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대부분의 교사가 기피하는 학생부장과 생활지도 일을 20년 이상 맡았다고 한다. 현장에서 학교폭력을 다루는 핵심 관계자로 재직해온 것이다. 책에 소개된 사례들은 오늘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교폭력의 실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이 아닌, 안타까운 현주소다. 저자는 학생 개개인에 대한 인정과 지지를 거듭 말한다. 학교폭력 가해자는 그만한 배경을 축적해온 결과다. 가정의 부모, 주위의 어른들의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학교폭력에 관한 다양한 사례와 처리 과정을 접하면서 학교폭력이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학교폭력 가해자에 대한 추궁과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

감상글(책) 2023.05.13

복수 / 여영현

복수 / 여영현 어릴 적 옆집에 용구가 살았다 풀빵 장사 하는 제 엄마를 돕는다고 학교도 자주 빠졌다 붕어빵에 든 달콤한 팥처럼 노릇노릇한 해가 기울면 용구는 제 엄마의 리어카를 끌며 다가왔다 그 친구는 소아마비를 앓았는데, 노을은 다정해서 좀 슬프다고 했다 가난의 색상이 있다는 걸 나도 알았지만 침묵했다 그런 용구가 병원에 실려 갔다 붕어빵을 뒤집는 갈고리를 만들다가 한쪽 눈을 잃었다 친구야, 철 심이 탁 하고 튀더니 앞이 환하더라, 우리가 빨아먹던 샐비어처럼 세상이 빨갰어. 용구는 제 엄마가 죽고 나서도 혼자 붕어빵 장사를 했다 밑천 없는 노동으로 더 가난해졌다 한데 이상한 건 붕어빵을 뒤집을 때마다 갈고리로 꼭 눈을 찍더라, 이젠 용구도 없다 교통사고였는데 죽어서도 한쪽 눈을 감지 않았다고 들었다...

감상글(시) 2023.05.11

우산들 / 박지우

우산들 / 박지우 비는 모든 존재의 키를 키운다지 어쩌면 인간의 내면으로 파고들기 위해 내리는지도 몰라 꽃을 탐하는 비의 건널목으로 산란하는 우산 하나, 둘 그리고 우산 셋 물비린내 날리는 여자가 위태롭게 걸어간다 화려하게 치장한 나비처럼 알록달록 동그랗고 투명한 얼굴들 목줄 풀린 개가 미끄러지듯 달려간다 울퉁불퉁 휘청거리는 비, 당신을 잃어버리겠어요 나, 비, 나비를 꿈꾸는 노랗고 빨간 지느러미 비의 몸뚱이들 후드득 후드득 앞다투어 뛰어내리는 오독의 문자들 백색소음에 출근길이 저만치 달아난다 - 『우산들』, 한국문연, 2022. 감상 – 박지우 시인의 고향은 옥천이고 현재 부천에 거주한다. 옥천은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다. 정지용은 부천 소사동에서 이삼 년 거주한 기록이 있어 시인은 더욱 친밀감을 느꼈겠..

감상글(시) 2023.05.07

<에세이> 풍경의 에피소드

이창윤, 『풍경의 에피소드』, 시와에세이, 2023. - 명륜동, 용산동, 상도동, 신림동 지하실 셋방, 난곡동, 부천, 영등포. 그리고 대구. 이창윤 시인이 살았던 곳이다. 용산동과 후암동은 해방촌이 있는 남산도서관 일대인데 이 시절 어머니를 여읜다. 용산동의 어린아이는 훗날 시인이 되어 이때의 슬픔을 “기억의 안간힘은 펄럭임도 없이/ 정지화면으로 멈춰 있네요”(「기억의 처음」)로 표현해 두었다. 상도동은 아버지가 빚쟁이를 피해 간 곳이다. 그 무렵 굶주린 남매들에게 아버지는 집의 괘종시계를 저당 잡히고 그 돈으로 국수를 사준다. 이 때의 심정은 시 「그날의 국수」로 남았다. 시인에게 괘종시계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난곡동으로 이사하면서 시계는 시간을 틀리게 알려주고 아버지도 부쩍 늙어간다. 괘종시계..

감상글(책) 2023.05.07

<에세이> 시지프스를 위한 변명

윤일현, 『시지프스를 위한 변명』, 학이사, 2016. - 『시지프스를 위한 변명』은 시인이면서 교육평론가인 윤일현 저자의 교육 인문학 혹은 인문학 교육 같은 책이다. 동서양 고전과 인물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에 사회 변화상을 읽고 교육 전문가의 생각을 더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저자가 한 손에 책을 든 정치인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마오쩌둥이 60세에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영어 공부를 시작할까 말까 고민하는 오십 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이어서 스티커 한 장을 붙인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호찌민도 여행과 독서를 통해 지도자 역량을 쌓은 걸로 소개되어 있다. 저자 자신도 독서광의 매력을 발산한다. 신호대기 중에 『말테의 수기』를 잠깐 읽는다는 게 뒤차가 경적을 울리고 심지어 ..

감상글(책) 2023.04.28

복로방(福爐房) / 여상현

복로방(福爐房) / 여상현 고린 자반 토막 퀴퀴한 길목짝 저마다 고달픈 노염인 양 뿜어대는 자욱한 담배연기 복로방 유난히 낮은 천정이 지친 나그네들의 가슴을 누른다 자꾸만 흐려지는 남포등 심지 돋구며 돋구며 갈(渴)한 하품 속에 다시금 내일의 이정(里程)을 헤아리며 감발을 푼다 돌아앉아서 부스럭대던 웬 중년 나그네 은전(銀錢) 소리를 내고 저 혼자 놀라 주춤하고 수잠을 자던 황아장수 영감도 덩달아 놀란다 목침을 못 벤 불평은 초저녁부터 코들이 들고 일어났고 「감돌」을 꺼내 보이며 입심껏 떠들던 영감님 긁적긁적 샤쓰 밑에서 금을 파는 게다 「대한독립」을 이러니저러니 큰 기침 섞어가며 떠들던 노인도 상노아이 못 데리고 온 것이 무척 뉘우치는 듯 안절부절못하다가 새우잠이 들었다 죽창(竹窓)을 밝히는 뜰 앞 장..

감상글(시) 2023.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