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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이야기 / 김석규

우리 동네 이야기 / 김석규 마흔 해 훌쩍 넘도록 살고 있는 동네 안면 터서 수인사하고 호형호제하던 사람들 이제는 눈 닦고 찾아보아도 없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마저 끊어진 지 오래 엎어지면 코 닿는 자리의 가게도 문을 닫았다. 늘 헐빈하게 비어 다니는 버스 타고 내리던 사람들 지키는 연쇄점 이젠 방수나 집수리 한다는 간판으로 바꿔달고 귀밑머리 새파란 새댁이 열었던 분식집 한 평이 채 될까 말까한 비좁은 곳 라면 국수 김밥도 말아 팔고 비 구죽죽이 오는 날은 노인네들 모여 정구지전 부쳐 막걸리로 주전부리도 했는데 문 닫고 어디로 갔는지 소식조차 감감하고 속절없이 물기 다 날아가버린 장작개비로 마흔 해 넘겨가면서 살고 있는 동네 -『눈』, 태산, 2023. 감상 – 시집 뒤편에 기록된 김석규 시인의 시집 권수..

감상글(시) 2023.04.18

겨울의 집

겨울의 집 / 김정수 겨울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알고 있지 허공에 창을 내고 소리 소문으로 드나들지 온기 없는 지상은 불타는 나무가 지키고 있지 그냥 만년설이지 문밖에 발 디딘 적 없는 불안이 얼음 침대에 누워 잠을 자거나 책을 읽지 피아노의 책장에서 부유한 숲을 잃어버린 마녀가 갑자기 튀어나와 달빛을 끄기도 하지 세상은 깜깜하게 투명하지 거꾸로 매달린 시계에서 꼬리별이 파닥거리다 숨이 멎지 순간 탐스럽지 사철, 우울 드리운 방에 커튼의 종말이 찾아오기도 하지 봄은 이불 속에 발을 집어넣었다 확 달아나 버리지 어쩌다 외출이 길 잃은 척 말을 걸기도 하지 침묵이 혼자 대답하지 녹색고지서가 배달된 날에는 북금곰이 쓰레기통을 뒤지지 그런 밤이면 죽음이 두툼한 외투를 구름에 매장하지 좌불안석이 내장된 의자엔 자..

감상글(시) 2023.04.11

<에세이>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전영애,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문학동네, 2021. - 내겐 독일 문학 번역자로 우선 기억되는 저자의 이번 책을 읽으니 저자에 대한 궁금증이 더 생긴다. 마침 유튜브에 이 올라와 있어서 흥미롭게 시청했다. 영상은 책 읽기 전이든 후든 아무 때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는 괴테의 시구에서 제목을 빌린 책이다. 저자가 운영하는 여백 서원, 그 뒷길엔 괴테의 시가 푯말을 대신하고 있고 그 꼭대기 어디쯤에 시비가 있다. 시비엔 “시간이 나의 재산/ 내 경작지는 시간”이란 시구가 적혀 있다. 저자는 젊은이들이 시간이란 어마어마한 상속분을 마음껏 경작하기를 빌어준다. 『파우스트』를 60년 동안 썼던 괴테가 바로 그런 사람임을 얘기한다. 소개한 괴테의 여러 시구 중에 “나를 ..

감상글(책) 2023.04.08

<소설> 해리 미용실의 네버앤딩 스토리

박현숙, 『해리 미용실의 네버엔딩 스토리』, 자음과모음, 2014. - 언젠가 딸아이에게 선물로 사준 책을, 딸은 바로 읽지 않고 얼마쯤 묵혀 두었다가 읽고는 다시 내게 내밀었다. 내가 읽지 않은 걸 알고 재밌다며 건넨 것인데 나 또한 얼마쯤 묵혀 두었다가 뒤늦게 읽는다. 재밌다. 중3 나이쯤 되는, 주인공 태산이는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사고로 돌아가신다. 아버지의 유품 상자엔 사진 한 장이 나온다. 해리 미용실 간판을 단 사진 뒷면, 태산이한테 그곳 미용실을 찾아가라는 당부가 한 줄 적혀 있다. 사진 한 장은 슬픔 속에서 여행 기분을 내고 모험 기분을 내는 단초가 되고, 해리 미용실의 정체는 조금씩 비밀을 벗기 시작한다. 소설 제목으로 차용된 (김태원 작사 작곡, 부활 노래)의 말뜻 그대로 이야기가..

감상글(책) 2023.04.01

반곡지에서

반곡지에서 / 이동훈 밤나무에 옷을 걸어두고 원효를 낳았다는 터, 제석사를 삼각형 꼭지에 두면 변의 끝점에 설총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반룡사가 있고 맞은편 끝점에 원효의 본가 터, 초개사가 있다. 그 초개사 가는 길에 반곡지* 있으니 어쩌면 원효가 여기 앉아 세속의 사랑과 인연에 도리머리하다가 떠났을 테고 아버지 흔적을 찾아온 설총이 더워진 가슴을 산바람에 식힌 후에야 일어섰을 테다. 원효와 설총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그 자리에 왕버들이 드레드레 앉아 있다. 뿌리에 가까운 밑동은 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틀려서 주름이 깊다. 추위로 깡깡 얼어붙은 날에도 가물어 바싹 말라붙은 날에도 뿌리 끝, 저 아래의 물기를 악착같이 끌어당긴 그간의 고투가 몸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도 바로서지 ..

메기 / 최란주

메기 / 최란주 아버지 검은 장화를 신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아직 덜 피어난 버들강아지 굼실굼실 시린 허리를 비틀 때 둥근 머리 큰 입가에 수염이 달린 길고 느린 속도가 미끄덩한 돌멩이 사이를 지나간다 보름을 앓아 밥알이 소태 같다는 어머니가 꼭 먹고 싶다는 메기매운탕 걱정 말라며 큰소리치고 나온 터 아버지가 물속 깊이 손을 넣어 꼬리를 잡으니 미끄러운 몸통이 손가락 사이로 재빠르게 빠져나간다 다시 몸통을 잡으려고 허리를 구부린다 됐다, 하는 순간 메기는 몸통을 감싼 손가락을 밀쳐내고 둥글게 허리를 꼬았다 펼치며 온 우주에 찬물 한 방울 튕겨놓더니 처음 태어났던 그곳으로 다시 사라진다 찬물 속 돌멩이가 장화 바닥을 밀어내자 기다렸다는 듯 차가운 물주먹들이 아버지의 몸을 풍덩, 잡아당긴다 또다시 일어나 메기..

감상글(시) 2023.03.28

아방가르드 / 권수진

아방가르드 / 권수진 혁명은 멀고 술은 가까워 익숙한 자리에서 발목을 자주 접질렀다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은 지 엊그제 같은데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은 내 일이 아니었으므로 아직 세상에 도래하지 않았다 여기서 딱 한 잔만 더 마시자며 술을 부추기는 친구 조언을 묵살하는 밤 방황이 이토록 긴 줄 알았다면 남들처럼 적당히 선에서 타협하는 인생을 살아야 했다 사랑은 여전히 어렵고 명멸하는 별빛 속에 북극성과 카시오페이아를 자주 혼동하곤 했다 삶이란 술 취한 회전목마 같아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가끔 버거울 때가 있다 아무런 줏대 없이 자꾸 2차를 권하는 무리에 휩쓸려 집은 점점 멀어지고 길은 점차 사라지고 막차 떠난 정거장을 한참 동안 서성인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면 아무래도 이번 생의 ..

감상글(시) 2023.03.26

시인학교 / 오탁번

시인학교 / 오탁번 소월이나 미당 생각하면 시 쓸 맛 영 안나겠지만 재주는 좀 없어도 꾸준하게 쓰고 또 쓰다 보면 내신 1등급 5% 안에는 들지 몰라 1등 2등 다툴 만한 고은이나 김춘수가 사람이다 말씀이다 하면서 3등급쯤으로 자진해서 나가는 걸 보면 너희들 흰소리 작작 하고 이슬비 맞으며 홀로 울면서 빗방울 찍어서 손바닥에라도 가련한 시 몇 줄 쓰고 또 쓰면 지용쯤은 친구 삼아도 되지 않을까? 박용래하고는 맞술 나눠도 큰 흉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내신성적이 뭐 대순가 실기시험으로 결판이 나는 거야 이 잡지 저 잡지로 너비뛰기 평론가 대학교수까지 높이뛰기 모든 욕 먹으며 오래달리기 심사위원 알음알음 턱걸이 하기 이쯤되면 소월이나 미당도 뒷발질로 넘어뜨리고 현대시사의 주동인물이 될 수도 있것다? (학생..

감상글(시) 2023.03.18

<소설> 통도사 가는 길

조성기, 『통도사 가는 길』, 민음사, 1996. 조성기 작가의 소설집에서 단편 「통도사 가는 길」과 「불일폭포」는 실제 장소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인물에 얽힌 사연들의 실마리를 좇거나 수습하면서 인물의 뒤를 따르는 여정은 퍽 흥미롭다. 표제작이기도 한 「통도사 가는 길」의 여정과 사건을 메모해 본다. 사내는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굴원 시집 『초사』를 가방에 넣고 대구행 고속버스를 탄다. 대구터미널 인근 여관에서 일박하면서 방음이 안 되는 방에서 「반야심경」과 『불의 정신분석학』을 오가며 무촉과 감촉에 대한 화두를 품는다. 이튿날 사내는 동대구역에서 삼랑진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삼랑진역은 이십구 년 전 아버지가 교원노조일로 수갑을 찬 채 부산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갈 때 어머니가 여기까지 따라왔다가 남..

감상글(책) 2023.03.08

<에세이> 후끈밤 낭독회

추선미, 『후끈밤 낭독회』, 싱클레어, 2022. - 인디 가수 ‘경주페터’는 경주 불국사 인근에서 문화 공간인 신촌서당을 운영하고, 책의 저자이기도 한 아내는 그 옆의 골방책방을 운영한다. 이 공간에서 독립출판, 낭독회,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부부가 함께 기획하고 진행한다. 후끈밤 낭독회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을 낭독하는 모임인데 이때 아내가 낭독했던 내용을 부부가 함께 책으로 엮은 것으로 보인다. 책의 처음 부분은 경주에 내려와서 키우던 두 아이 이야기가 많다. 아이가 바깥 체험을 하고 결과물에 뿌듯해하는 걸 보고 그렇게 “한발씩 너의 것을 찾아가렴. 조금씩 덜 돌아보면서”라며 아이를 응원하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인 를 큰아이와 함께 보면서 영..

감상글(책) 2023.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