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724

<에세이>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노정희,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학이사, 2023. 노정희 수필가의 요리 관련 에세이다. 요리법뿐만 아니라 해당 요리에 대한 이전의 기록을 살피며 역사적이고 민속학적인 자료도 알뜰히 소개한다. 작가는 약선설계사이기도 하다. 요리의 영양이나 효능을 살피며 어떻게 하면 요리를 통해 더 좋은 기운을 더 얻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유용한 지식이 많다. “더덕 요리에 고추장을 사용하는 것은 찬 성질에 뜨거운 성질을 넣어 조화를 맞춰주는 것이다. 잔뿌리가 많은 것은 말렸다가 물을 끓였다. 대추를 넣어서 끓이며 차로써 손색이 없다. 감기 기운이 있을 때는 생강을 넣어 끓이면 그만이다”라고 했다. 더덕의 효능을 취하면서도 개개인의 몸상태에 따라 고추장, 대추, 생강 등의 더운 성질의 음식으로 보완을 꾀하는 방..

감상글(책) 2023.12.09

<에세이> 강가의 아틀리에

장욱진, 『강가의 아틀리에』, 열화당, 2017(초판 1975, 중판 1986) - 장욱진 화가(1917〜1990)의 회고전이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2024.2.12.)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초창기 작품부터 250여점이 전시되어 볼거리가 많다는 입소문이 돈다. 전시회 날짜를 확인하며 『강가의 아틀리에』를 읽는 시간을 갖는다. 언제적 교과서에서였을까. 그의 (1951)을 한참 본 기억이 있다. 노란 보리밭을 지나 고향집(충남 연기)으로 돌아오는 사내는 검은 정장에 검은 가방과 검은 우산을 든 모습이다. 장욱진이 알고 있지는 못했겠지만 몽마르트에 온 에릭 사티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긴 했다. 장욱진은 피란 시절의 혼란 속에서 불안과 초조가 자기를 감쌀 때 이곳 고향에서 “시험지와 말라버린 물감 몇 개”로 미..

감상글(책) 2023.11.22

파라솔 / 김재진

파라솔 / 김재진 발레리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라고 노래했지만 바람이 불면 나는 마당에 펴놓은 파라솔을 접어야 한다. 태풍이 온다는데 접지 않고 내버려둔 파라솔을 길 가던 누군가 문 따고 들어와 접어놨다. 문 열어놓고 다니는 나를 알고 있는 누구인지 지나가던 우체부나 검침원인지 내 집을 제 맘대로 들고나는 사람들께 경외심을 느낀다. 생명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무단침입에 대한 경외이니 이건 그들과 나 사이에 금 긋지 않은 경계 없는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다. 봐라.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지 않느냐.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파라솔까지 접어주니. 접히는 것들은 다 아름답다. 너와 나 사이에 금 그어놓은 뭔가를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한 수 접어준다는 말이다. 한 수 접고 모르는 척 네 ..

감상글(시) 2023.11.12

<에세이>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

한국문화분권연구소 김용락,박상봉 편저,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 마음시회, 2021. - 백기만 시인은 『상화와 고월』(1951)에 이어 『씨뿌린 사람들』(1959)을 통해서 이상화와 이장희뿐만 아니라 대구 경북의 예술인들의 삶과 예술을 채록하고 세상에 알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분이지만 본인의 책을 따로 엮지 못한 데다 한 세대가 바뀌어가는 동안 별다른 조명도 받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해서 기획된 책이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이다. 1부는 백기만에 대해서 살피고, 2부는 『씨뿌린 사람들』에 언급된 예술인들을 다시 호명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씨뿌린 사람들』(1959)은 작고 예술가들을 가까이 알고 지냈던 인물이 글을 쓴 것이라면, 이번 책은 이후에 축적된 자료로 원전을 ..

감상글(책) 2023.11.05

봄비 / 이은새

봄비 / 이은새 화분에 물을 주듯 비가 온다 물에 빠진 붓이 몸을 털어내듯 봄비가 온다 아다지오로 분무질을 시작한 하늘 바람의 마음을 타면서 방향 감각을 잃고 그렇지만 세심한 줄기로 내린다 어둠 속 보이지 않던 먹구름들 힘을 키우기 위한 세력이었으니 바닥을 구르다 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천사의 탈을 쓴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희뿌연 하늘이 내게 보낸 경고의 메시지, 마음을 두드리면 밑바닥까지 스며든 빗방울들 하나가 되기 위한 준비된 장난이었으면 했다 참새 눈물만큼 인색하던 시간도 제 갈 길 가고 언제나 그랬듯이 비 갠 후의 청명한 하늘은 더욱 경쾌함에 신경 쓸 것이리라 웅덩이에 응달진 눈물, 그 자리가 아직 남아 있다면 햇살 쨍쨍한 날 마음을 모두 내려놓아도 좋으리 달아나는 너를 애..

감상글(시) 2023.10.31

병꽃나무를 들이다 / 이비단모래

병꽃나무를 들이다 / 이비단모래 뒤꼍 흰 병꽃나무 무성한데 왜 나는 남의 붉은 병꽃을 탐했을까 -그 꽃 예쁘대 막걸리 한 잔 주며 건넸을 뿐인데 신새벽 뿌리째 뽑아왔네 굳이 달란 건 아니고, 그냥 갖고는 싶었던 남의 것 그것도 남자의 홀로 된 눈동자에 담았을 꽃을 -꽃 피면 같이 보자고 꽃이야 거기 있으나 여기 있으나 똑같은데 왜 내 울안에 놓고 싶었을까 사랑을 내 마음에 가두고 싶었을까 머언 눈으로 봐도 그 자리 있을 너를 -『꽃잠』, 문화의힘, 2023. 감상 – 병꽃나무는 꽃 핀 모양이 병 모양을 닮았다고도 하는데 정확히는, 꽃 피기 직전의 꽃봉오리 모양이 병 모양을 연상케 한다. 물론 병 종류 따라 모양도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니 대충 그렇다는 뜻이긴 하다. 병꽃나무는 꽃의 색깔에 따라 흰병꽃나무와..

감상글(시) 2023.10.25

<에세이> 사람이 사는 미술관

박민경, 『사람이 사는 미술관』, 그래도봄, 2023. - ‘당신의 기본 권리를 짚어주는 서른 번의 인권 교양 수업’. 책 표지에 나온 글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소속으로 인권 교육을 담당했던 저자가 들려주는 인권에 관한 이야기가 책의 주된 내용이며, 그림은 이야기의 실마리 혹은 매개로 작용하고 있다. 소싯적 달력 명화를 보면서 그림에 빠져들었던 경험,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의 그림을 실제 보면서 설렜던 감정 등 그림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전공인 인권을 만나서 저자 스스로 흥을 내면서 글을 썼다는 인상을 받는다. 난해한 이론이나 단순한 지식 나열을 피하고 삶과 결부된 인권의 여러 측면과 그 의미까지 쉽게 풀어쓴 것도 이 책의 장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여성, 노동, 차별과 혐오 등의 목차에 따라 소개..

감상글(책) 2023.10.23

하일시초 / 신동집

하일시초(夏日詩抄) / 신동집 여름도 방학철 오전 한때를 서창(西窓)에 다붙은 포도시렁 아래 고흐의 걸상을 내다놓고 한동안 시름없이 잠기는 일이 있다. 댓평 될까마는 땅그늘이지만 오전엔 집에서도 기중 시원한 곳이다. 담장과 시렁 사이로 열린 하늘 조각이 또한 유난히 맑은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여름날의 내 영혼의 빛깔이랄까. 이 파란 하늘 조각을 무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덧 허공엔 빈 조롱이 하나 흔들리듯 말며 시름없이 걸려 있다. 이따금 한두 마리 이승의 새는 날아가도 그들 눈에 이 조롱은 보일 리 만무하리라. 조롱 속에 담긴 내 마흔의 여름날들, 생각은 하염없이 물레실을 푼다. 어느덧 뙤약빛도 발밑으로 밀리고 시렁에도 후끈한 김이 서리면 다른 데로 나는 또 그늘을 옮겨야 한다. 그러나 조롱은 매양..

감상글(시) 2023.10.22

<영화 에세이> 호우시절

백정우, 『호우시절』, 피서산장, 2022.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6. - 『호우시절』은 백정우 영화평론가의 네 번째 영화 이야기로서 비를 소재로 한 영화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비가 어떻게 내리고, 어떻게 보여주었으며, 하필 그때 왜 비가 내려야 했는지 탐색한 추적의 기록이다. 예컨대 비 내리는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는지, 비는 어떤 정서를 담아내는지, 비 오는 장면 한 쇼트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고가 더해졌는지, 혹은 어떤 감독은 왜 영화마다 비 내리는 장면을 넣는지 등을 망라한다”는 말 그대로다. 비 오는 장면 말고도 전체 영화 내용과 영화 주변의 사람과 작업까지 정성스레 소개하는 모습에서 영화 마니아의 안목이 느껴진다. 책을 읽은 것을 계기로, 소개된 많은 영화 중에 (2002)과 (201..

감상글(책) 2023.10.14

독작 / 나석중

독작(獨酌) / 나석중 목련은 어떤 지극한 마음으로 꽃을 향해 가는지 꼿꼿이 세운 그 꽃봉오리 끝으로 나 속절없이 당신에게 안부를 적고 싶네 텁텁한 막걸리 한 병이면 당신을 사흘 견디네 돼지고기 한 근 끊어 김치찌개를 끓일 때 문득 당신이 찾아오네 그러나 아주 가끔 하루 한 잔으로 족하네 당신은 팔부 능선쯤 차오를 때 제일이네 외로움도 아껴야 해 나 외로움을 너무 낭비하는 게 아닌지 넉넉히 차오른 당신을 굽어보는 동안 어느새 낮달처럼 떠오르는 당신은 웃는지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달래주는 오늘 당신은 나의 반주라네 -시선집 『노루귀』,도서출판b,2023. / 『목마른 돌』(2019) 감상 : 독작이란 제목의 시가 많은 줄 안다. 술을 하든 안 하든 독작이란 제목 자체가 삶의 한 구경(究竟)에 가 닿아 ..

감상글(시) 202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