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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 이병각

두더지 / 이병각 할망이는 두더지를 산 채로 붙들었다. 모가지를 노끈으로 홀쳐 가지고 이십 리나 먼 땡볕 길을 더듬어 서울에 들어왔다. 삶아 짠 산나물 몇 죄기를* 길거리에 편 다음 산나물을 사든지 두더지를 사든지 또는 두 가지를 다 사든지 마음대로 해보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오정(午正) 부는 소리도 벌써 한 나절 지나고 나니 사람들은 점심을 치른 기운으로 걸음을 빨리 걷기만 하고 두더지와 산나물은 돌아다보려는 기척도 없었다. 두더지는 할망이보다 훨씬 빨리 지쳐서 기운 하나 없이 착 늘어졌는데 햇볕을 본 덕으로 눈이 까져버려서 비위가 틀리지는 안 했으려나, 할망이는 요기할 생각이 나지 않은가 궁금하였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 할망이 산나물 두더지 셋이서 모두 집 생각이 간절하였다. * 죄기를 : 산나물..

감상글(시) 2023.01.27

친구들 / 이승욱

친구들 / 이승욱 O 별명은 까마귀 바둑을 잘 두었다. D는 철학자 근엄한 두 개의 안경알 속이 늘 불안했다. I는 가난한 휴머니스트 봄에 핀 무꽃 같은 그의 삶에는 늘 눈물이 감돌았다. 나는 몽상가 절망을 사르던 반란의 불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저가 싫어서 저와는 다른 세상을 좇아 달아났다. 부도덕한 시의 이름으로 합쳤던 위대한 도당들, 소주가 헐한 포장집에서 그들과 나는 낮술에 취하고 씌어지지 않는 시는 없다고 하였다. 씌어진 시들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남은 심심한 날 우리는 모두 어중간한 시를 썼다. 이제 그 지겨운 추억의 자리에 남은 사람은 없다. 이제 그 두려운 시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지금도 텃밭에 무꽃은 피고 지금도 교정의 분수는 물보라를 끓이고 지금도 낮술에 취한 ..

감상글(시) 2023.01.23

<산문> 나를 바다를 닮아서

반수연, 『나는 바다를 닮아서』, 교유서가, 2022. - 산속 생활 이야기를 다룬 방송 ‘자연인’을 보면,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엔 출연자가 어찌 살았는지, 무슨 이유로 산에 들어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속사정을 털어놓는 시간이 매회 이어진다. 산속 생활의 패턴이나 자연인의 고백이 식상하다는 평도 있지만 우연찮게 접한, 자연인의 삶에 눈과 귀뿐만 아니라 마음을 내줄 때도 있다. 이번에 읽은 산문집 『나는 바다를 닮아서』를 일독한 기분도 그렇다. 책에 빠져들어 잘 익은 이야기를 좋게 듣는 기분이다. 반수연 작가는 통영 서호시장에서 성장해서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 갔는데 산문집에서 그런 내력과 사연을 살펴볼 수 있다. 성장배경이 된 서호시장 이야기는 작가의 첫 소설집 『통영』을 읽게 되면 다시 펴 ..

감상글(책) 2023.01.20

<만화> 너를 그리며

만화 『너를 그리며』(최인선 글 그림), INSUNNY, 2022. - 아름다운 만화책 한 권이 내게 닿았다. 서로 품을 내고 품을 갚는 품앗이 비슷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나온 책이다. 품을 살 때 미니 달력은 선택 항목에 있었고 그 자체로 귀한 선물로 되었다. 그런데 항목에 없었던, 그림 있는 작가의 사인이 퍽 정성스러워 이 또한 선물이다. 품을 산 모든 벗들에게 작가 스스로 품을 더 내서 그림 사인을 보내는 마음이 소중하게 와 닿는다. 다른 선물도 좋지만 진짜 선물은 만화책이다. 만화 속 중학교 아이는 어느 날 집 앞의 은행나무가 보내는 따스한 기운을 알아차린다. 그날 이후 은행나무 정령과 아이의 내밀한 교감은 시작된다. 이사와 함께 이별은 찾아오고 뒷날의 재회는 아프고 뭉클하다. 한 컷 한 컷의 ..

감상글(책) 2023.01.20

<산문> 그 아침에 만난 책

이기철, 『그 아침에 만난 책』, 양산시민신문, 2022. - 책에 관한 책이다. 차례에 잡힌 책은 105편이지만 실제는 조금 더 된다. 몸이 아픈 중에도 부지런히 읽고 쓴 기록이다. 읽고 쓰는 일이 약이 되었는지 이기철 시인의 몸도 좋아졌다. 다른 묘약이나 처방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책 선택 기준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특정 경향을 띠지 않지만 시인의 가슴에 한 번씩 울림을 주었던 책이다. 시인의 페북엔 매일매일 전국의 책방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사냥해온 책 사진이 올라온다. 책은 쌓아두기만 해도 좋은 것이라고 하지만 시인은 수시로 허물고 새로 쌓는 신공을 지녔다. 책을 독파해낸 시간과 정성은 『그 아침에 만난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아직 쌓여 있거나 나날이 쌓일 책을 위해서 점심, 저녁, 오밤중에..

감상글(책) 2023.01.14

골목 안 국밥집 / 엄원태

골목 안 국밥집 / 엄원태 골목 안의 그 식당은 언제나 조용했다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언제나 방안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느릿느릿 차려주는 쟁반 밥상을 나는 수배자처럼 은밀히 찾아들어 먹곤 했다 밥을 기다리는 잠시 동안의 그 적요가 왠지 나는 싫지 않았다 한번은 직장 동료와 같이 간 적이 있는데 을씨년스레 식은 드럼통 목로들을 둘러보며 그가 추운 듯 그 적요를 어색해하는 것을 보곤 이후 죽 혼자만 다녔다 가끔씩 국이 너무 졸아들어 짜진 것을 빼고는 콘크리트처럼 딱딱한 채 언제나 적당히 젖어 있던 그 식당의 쓸쓸한 흙바닥까지 나는 사랑하였다 그 식당이 결국 문을 닫고 아이와 함께 늘 어두운 방안에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어디론가 떠나버린 뒤, 집수리가 시작된 철거 현장에서 나는 어린 딸아이의 끊임없는..

감상글(시) 2023.01.10

<그림 에세이>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황정수,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푸른역사, 2022, 감상 – 미술 관련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그림 감정에도 조예가 깊은 작가답게 근대 경성을 배경으로 활동했던 화가와 서화가(書畵家)들의 면모와 작품 양상을 종횡으로 자유로이 엮어서 출간한 책이다. 때로 주거지나 출신으로, 때로 인간관계로, 때로 영향을 주고받은 관계로, 무엇보다 작품 그 자체로 화가의 삶과 예술을 조망하고, 여기에 풍성한 에피소드까지 곁들여 놓았기에 책 읽기가 우선 즐겁다. 서촌과 북촌으로 나뉜 두 권의 책을 따라 읽으면, 화가들의 천국이란 유럽의 파리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물론, 천국은 예술가들이 득시글하다는 수사일 뿐 대개의 예술은 이런저런 부침과 좌절 속에 깊어지는 속성을 갖고 있다. 주제별로 나뉜 이야기 중에,..

감상글(책) 2023.01.09

<산문> 시는 늙지 않는다

신석초, 『시는 늙지 않는다』(신석초 문학전집2), 융성출판, 1885. 감상 – 신석초 시인(1909〜1975)은 1935년 정인보 선생 집에서 이육사 시인(1904〜1944)를 처음 만난 후 십 년 가까이 둘도 없는 막역지우로 지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서 찾아본 책이고 이육사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았지만 두 사람 관계는 시간을 두고 좀 더 공부해볼 필요를 느낀다, 두 사람이 같이 잘 아는 이병각(1910〜1941) 시인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수확이다. 이육사가 경기 말을 쓰려고 하는 편인 반면에 안동 지척이라고 할 수 있는 영양 출신 이병각 시인은 사투리를 대놓고 쓰면서도 전통이든 인습이든 간에 가문의식에 대한 저항이 컸다고 한다. “늬, 조상 뼈다귀 작작 팔아묵어라. 퇴계 뼈다귀가 앙상하겠구..

감상글(책) 2023.01.04

<산문> 그린 노마드

김인자, 『그린 노마드』, 학이사, 2022. 감상- 김인자 시인의 여행 산문이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쓰던 시인은 현재는 대관령 숲에 거주지를 두고 이곳에 머물 때가 더 많다. 그렇다고 시인의 여행이 끝난 것은 아니다. 해외로 다녔던 날의 기억을 불러오고, 국내 사찰을 찾아가 풍경소리를 듣고 오기도 한다. 전보다 활동 폭이 좁아졌을 순 있으나 여행의 밀도는 여전히 알뜰하고 내밀하다. 근래, 믹스커피 서른 개로 지하에서 221 시간을 견디며 삶의 불빛을 좇던 광부 소식을 들었기에 시인의 글 중에 커피와 차 이야기가 눈에 크게 띤다. 말라위 퉁가의 차밭에서 시인이 만난 노동자들은 하루 10시간 일하고 버스비를 아끼려 서너 시간 걸어서 귀가하면서도 오직 차만은 마음껏 마실 수 있다며 ..

감상글(책) 2023.01.01

핑퐁게임 / 이환

핑퐁게임 / 이환 공은 함부로 날뛰는 짐승 같아서 성질머리를 살살 달래주어야 한다 저돌적으로 날아온 공을 되받아 후려친다면 빗나가기 십상 이럴 땐 포물선을 그리듯 부드럽게 넘겨줘야 한다 아무 때나 라켓을 휘두르는 건 하수나 하는 일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슬쩍 커트만 찔러줘도 된다 있는 힘껏 스매시를 날리거나 과감한 드라이브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도 때론 필요하다 고수의 테크닉이란 그런 것 공을 갖고 놀 줄 알아야 한다 변화와 코스를 생각하며 포핸드와 백핸드로 요리할 줄 알아야 한다 공은 나의 허점을 집요하게 공략한다 비틀거리는 순간 금방 알아차린다 항상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 승패를 가리는 게임의 세계에서 막판엔 누구나 한방에 주저앉는다 한방에 메달을 거머쥐는 자가 있고 한방에 낙향하는 자가 있다 뼈..

감상글(시) 202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