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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괴테(박영구 역),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푸른숲, 1998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들여놓고도 이탈리아 갈 일도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있어서인지 좀처럼 진도를 내지 못했다. 미적미적 나서도 결국 끝에 닿게 되는 건 괴테의 힘일 것이다. 괴테(1749-1832)는 1786년 9월부터 1년 9개월 간 이탈리아 여행에 나선다. 여행 중 1년 이상은 두 번에 걸쳐 로마에 체류한다. 괴테는 여행 전에 로마와 다른 도시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공부한 상태이고 여행 중에도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 지역의 특징과 풍속, 자연과 식생, 건물과 유적지, 조각이나 그림, 만난 사람까지 세세하게 기록한다. 그런 중에 자기가 본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주변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는 일도 멈추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여행과..

감상글(책) 2022.12.26

눈 오는 저녁 / 김소월

눈 오는 저녁 / 김소월 바람 자는 이 저녁 흰눈은 퍼붓는데 무엇하고 계시노 같은 저녁 금년은…… 꿈이라도 꾸며는! 잠들면 만날런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눈 타고 오시네. 저녁 때, 흰눈은 퍼부어라. 『진달래꽃』, 매문사, 1925. / 『김소월 시전집』(권영민, 2007) 감상 : 김소월 시인(1902〜1934)의 『진달래꽃』은 문화재로 등재된 시집이다. 시집 속 127편의 시 중에 절반 이상이 노래로 불릴 정도로 축복 받은 시인이지만 당사자는 알지 못한다. 「눈 오는 저녁」도 여러 곡이 창작되고 있는 중에 백순진이 곡을 붙이고 박상규가 노래(1972) 부른 것이 오리지널에 가까워 보인다. 1974년, 백순진 본인이 참여한 ‘사월과 오월’에서 다시 부르더니, 1978년 백순진 프로덕션을 통해 음반을 낸..

감상글(시) 2022.12.22

롱롱 파이프 / 이향지

롱롱 파이프 / 이향지 할아버지는 담뱃대로 잎담배를 비벼서 피우셨다 긴 담뱃대 끝 불함지에 잎담배를 꽁꽁 다져 넣고 마루 아래 놋화로에서 잿불을 뒤적거려 담뱃불을 붙이곤 했다 할아버지는 눈뜬장님 할아버지 담뱃대는 롱롱 파이프 어느 날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담배를 피우시다 잎담배 대신 조그만 고모를 불함지에 눌러 넣었다 기분 좋게 담뱃불을 붙여 빨아들이자 연기 대신 조그만 고모가 할아버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할아버지는 목에 걸린 고모를 칵칵 소리 내어 뱉었다 할아버지는 눈뜬장님 할아버지 담뱃대는 롱롱 파이프 난데없이 마당에 떨어진 고모를 안고 할머니는 술도가로 달려가서 큰 독 속에 숨었다 갓 빚은 술이 가득 들어 있는 깊은 항아리 술독에서 건진 할머니는 반신불수가 되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대소변 받아 내..

감상글(시) 2022.12.17

흘러도, 그 장맛 / 이진환

흘러도, 그 장맛 / 이진환 어스름이 든 표정들을 들여다보며 가슴에 동여맨 조바심을 내려놓던 물 한 모금에 늘 열려있는 사립문이야 그렇다 쳐도 하루쯤 건너뛰어도 좋을 하루해를 등짐하고 치워도 어질러진 모습을 한 외진 집 댓돌 위에 좀 오랜 기억과 닮은 신발은 그림자에 닿도록 허리춤을 무너뜨린 억척이고 억장이었습니다. 손끝을 놓지 못하는 어머니의 봄 이른 나물에서 우리는 자라나고 햇살 기댄 담장에서 허기 쫓는 눈빛으로 다투었지만 밥맛 좋고 힘을 쓰는 데는 장맛보다 더한 것이 없다며 담그는 손에 정성이 여간 아니던 붉은 고추에 감스름한 장독을 열어두고 꾹꾹 누른 된장까지 턱 하니 볕에 내어놓으니 만석꾼이 어디 이럴까 아무리 힘든 일 닥쳐도 뭔 걱정이랴 맛나게도 쑥쑥 자라는 새끼들 어디가 깨져 다쳐도 저 된장..

감상글(시) 2022.12.10

미도다방 / 전상렬

미도다방(美都茶房) / 전상렬 종로2가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정인숙 여사가 햇살을 쓸어 모은다 어떤 햇살은 가지 끝에 걸려 있고 어떤 햇살은 서릿발에 앉아 있다 정여사의 치맛자락은 엷은 햇살도 알뜰히 쓸어 모은다 햇살은 햇살끼리 모여 앉아 도란도란 무슨 얘기를 나눈다 꽃시절 나비 얘기도 하고 장마철에 꺾인 상처 얘기도 하고 익어가는 가을 열매 얘기도 하고 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도 추억은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종로2가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풀어 놓고 차 한잔 값의 추억을 판다 가끔 정여사도 끼어들지만 그들은 그들끼리 주고받으면서 한 시대의 시간벌이를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힘』, 나눔문화사, 1995. 감상 – 성곽도시였던 대구는 읍성을 허물고 성곽..

감상글(시) 2022.12.05

가을이 오는 달 / 김현승

가을이 오는 달 / 김현승 구월에 처음 만난 네게서는 나프탈렌 냄새가 풍긴다. 비록 묵은 네 양복이긴 하지만 철을 아는 너의 넥타인 이달의 하늘처럼 고웁다. 그리하여 구월은 가을의 첫 입술을 서늘한 이마에 받는 달. 그리고 생각하는 혼이 처음으로 네 육체 안에 들었을 때와 같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너의 눈은 지금 맑게 빛난다. 이달엔 먼 수평선이 높은 하늘로 서서히 바꾸이고, 뜨거운 햇빛과 꽃들의 피와 살은 단단한 열매 속에 고요히 스며들 것이다. 구월에 사 드는 책은 다 읽지 않는다. 앞으로 밤이 더욱 길어질 터이기에 앞으론 아득한 별들에서 가장 가까운 등불로 우리의 눈은 차츰 옮아 올 것이다. 들려오는 먼 곳의 종소리들도 이제는 더 질문하지 않는다. 이제는 고개 숙여 대답할 때다. 네 무거운 영혼을 ..

감상글(시) 2022.11.30

<산문>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이윤학,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간드레, 2022. - “내 조그만 공간 속에 추억만 쌓이고 / 까닭 모를 눈물만이 아른거리네./ 작은 가슴 모두 모두어 /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김광석의 노래로 알려진 의 일부다. 얼핏 류근 시인의 시를 김광석이 노래로 불렀던 처럼 도 이윤학 시인의 시인가 싶었는데 아니다. 여러 가수에게 리메이크 된 는 1976년 송문상이 작사해서 이미키 가수에게 준 노래다. 이후 이미키는 송문상의 아내가 된다. 송문상은 이 노래에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실려 있다고도 했다. 그럼, 이윤학 시인은 의 가사를 자신의 산문 제목으로 왜 가져왔을까. 1993년 가을, 라디오 방송에서 김광석 가수가 이윤학의 첫 ..

감상글(책) 2022.11.18

금강역 / 김수상

금강역 / 김수상 유월의 한낮, 느티나무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네 첼란의 돌과 속눈썹과 검은 우유와 심장을 생각하네 늦은 당신은 더 늦어도 오지 않고 철길 너머에는 비를 몰고 오는 먹구름 몇 장 비는 다녀가도 당신은 오지 않네 푸른 돌을 매단 느티가 한낮의 흰 이마를 때릴 때 번쩍이는 잎들 거느리고 기차는 지나가네 나는 헌신짝처럼 남겨져 이젠 당신을 쓸 수가 없네 -『물구라는 나무』, ㈜여우난골, 2022. 감상 – 시인이 다녀간 금강역은 대구 금호강(琴湖江) 가의 역사로 보인다. 대구선 구간을 이동해서 2005년 신설된 역이지만 이용자가 많지 않아 현재 여객 업무가 중단된 상황이다. 바람이 종일 머물다 가는 쓸쓸한 이 공간에 변화의 조짐도 있다. 뒤편 금호강과 앞편 연꽃 단지 사이를 잇는 산책로를 조성하..

감상글(시) 2022.11.13

<산문> 나는 태양 때문에 그를 죽였다

채형복, 『나는 태양 때문에 그를 죽였다』, 학이사, 2022. ㅡ법학자이면서 문학도이고 시인이기도 한 저자는 법과 문학을 넘나드는 글쓰기 끝에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법정에 선 문학』을 통해 필화 사건을 겪은 한국 문학을 다루었고, 이번 『법으로 읽는 고전문학 : 나는 태양 때문에 그를 죽였다』에선 유럽의 고전 작품을 법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기를 꾀하고 있다. 여덟 편의 고전 중에 존 밀턴의 『실낙원』을 보자면, 법의 적용을 고민하기보다는 풍성한 문학 이야기의 꽃을 피워 놓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메리 셸리가 쓴 『프랑켄슈타인』과의 관계다.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이 『실낙원』을 읽고 아담과 사탄의 감정에 이입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했다. 궁금증이 생겨 『프랑켄슈타인』에서 관..

감상글(책) 2022.11.10

<동화> 아이 돌보는 고양이 고마워

박채현 글 이은주 그림, 『아이 돌보는 고양이 고마워』, 봄마중, 2022. - 『아이 돌보는 고양이 고마워』 표지 그림을 보면 고양이가 새끼를 돌보는 게 아니고 사람 아이를 돌보는 가사 도우미로 등장한다. 동물과 얘기하는 동화는 이미 판타지다. 고양이의 말과 행동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친밀감을 느낀다면 고양이가 아이를 돌보고 어른을 설레게 하는 스토리는 판타지가 아니고 현실이기도 하다. 실제로 주변에 동물을 가까이하면서 대화를 곧잘 하는 사람이 드문 건 아니다. 쌍방향 대화인지 의문은 있지만 고양이와 개는 반려동물로 다른 가축과 구별되는 지위를 얻고 있다. 고양이나 개가 그런 지위를 갖기 위해서 애를 쓴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선택이 그리되었을 것이다. 이 또한 편견일 가능성은 열어 두자. 고양이 속을 누..

감상글(책) 2022.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