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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 노천명

반려(斑驢) / 노천명 도무지 길들일 수 없는 내 나귀일레 오늘도 등을 쓸어주며 노여운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너와 함께 가야 한다지…… 밤이면 우는 네 울음을 듣는다. 내 마음을 받을 수 없는 네 슬픈 성격을 나도 운다. - 『산호림』(1938) / 『사슴의 노래 - 노천명 전 시집』, 스타북스, 2020 감상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노천명의 「사슴」은 한때 시인의 자화상을 얘기하는 걸로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근래, 시인 백석과의 교류가 알려지고 1936년 “한 개의 포탄”(김기림의 말)처럼 등장한 백석의 시집 제목이 『사슴』인 게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거라는 짐작이 있었다. 여기에 당대 모윤숙, 최정희, 노천명으로부터 백석이 사슴으로 불리던 편지 등이 공개되면서 사슴의 주..

감상글(시) 2022.07.27

<에세이>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

임창아,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 학이사, 2020. 이것을 견디지 않을 수 있을까? 수없이 나를 의심했다 자주 불가능해서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 위의 글은 최문자 시인의 시집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의 자서다. 생략과 역설의 묘미가 섞인 문장이라서 바로 와 닿지는 않지만 시집의 자서인 것을 감안하면, 자신의 시를 스스로 견디는 일이 어렵다는 말로 들린다. 더 절실하고 더 나은 어떤 경지에 미치지 못함을 인정하면서 그 한계를 슬퍼하는 진정성이 울림을 준다. 임창아 시인은 이 구절을 산문집 제목으로 차용했다. 견디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쏟아지는 기성품 같은 작품을 신뢰하지 못하는 시인의 인식이 엿보인다. 몸과 마음을 앓아가며 글을 쓰면서 이전에 없는, 있어도 구별되는 “새로운 의미..

감상글(책) 2022.07.21

<에세이> 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

고향갑, 『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 파람북, 2022. - ‘한 글자’ 이야기를 시작해서 그때그때 매조지한 것이 예순아홉 번에 이르렀고, 이를 묶어 산문집 『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이 나왔다. 목차를 보니 둘, 옆, 곡으로 시작해서 쫌, 볕, 참(慘)으로 끝난다. 이 중에 을 보니, 작가가 감옥살이 경력이 있고 그 시절, 아내가 될 사람의 희생도 있었는 줄 알겠다. ‘옥’은 한자 모양새처럼 개 두 마리가 말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꼴이란다. 감옥이 아니더라도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말과 말이 서로 보듬지 않거나 통하지 못하면 그곳이 바로 감옥”이며, 우리 사회가 혹 그런 꼴을 하는 경우가 없는지 작가는 묻는다. 에선 갑질 중지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청소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자들의 태도와 막말을 비..

감상글(책) 2022.07.18

<소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발터 벤야민(윤미애 옮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길, 2007. -1931년 경 『베를린 연대기』를 쓰고 몇 차례 출판이 좌절되고 조금씩 수정 보완해서 1938년경 다른 이에게 원고를 맡긴 게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이다. 저자는 나치를 피해 망명하려는 계획이 좌절되자 1940년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의 유년시절 이야기는 장면 장면의 단절된 회상과 그런 중에 어떤 의미를 환기하려는 의도에 의해서 전체적으로 연결되는 서사적 재미는 줄었지만 몇몇 인상적 장면은 이를 상쇄할 만하다. 저자는 망명 시절, 유년의 이미지를 불러 내면을 치유하는 예방접종의 효과를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고 서문에 밝혔다. 나비 채집하던 유년을 떠올리며, “나비로 가득 채워진 그 공기를 뚫고 떨림 속..

감상글(책) 2022.07.18

<소설> 장난감 도시

이동하, 『장난감 도시』, 문학과지성사, 2009(초판본, 1982) - 『장난감 도시』, 2009년 3판본과 1982년 초판본 사이에 문장을 일부 다듬고, 민감한 내용을 살짝 들어낸 것이 보인다. 시작 페이지를 보니, “내가 이 무렵의 일을 비교적 잘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오로지 학예회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도 그럴 것이, 매년 한 번씩 갖기로 되어 있는 학예회를 전쟁 통에 여러 해나 걸러 오다가 그해에야 우리는 비로소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에서 “학예회 덕분이라고 생각된다”를 “학예회 덕분이다”로, “여러 해나”를 “여러 해”로 수정한 것에서 말을 아끼는 퇴고의 묘를 맛볼 수 있다. 내용에선, 소설 말미의 ‘누나’와 관련된 이야기 열다섯 줄이 통째로 빠졌다. 독자에 따라선 납득하기 어려운 불편..

감상글(책) 2022.07.15

<에세이> 다시, 지역출판이다

신중현, 『다시, 지역출판이다』, 학이사, 2022. - 1954년 대구출판번호 1-1로 시작된 이상사(理想社). 1987년 이상사에 입사한 이래, 책 읽고 만드는 일이 마냥 좋아서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일하던 사람, 창업주의 신뢰를 얻어 이상사 경영을 잇게 되고 2007년 학이사(學而思)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까지 지역출판의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 책 파는 운까지 타고난 사람, 바로 학이사 대표인 신중현 선생이다. 배우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배우고. 학이사 이름은 인(仁)을 첫 번째로 생각하는 공자의 말에서 따왔다고 하니 놀랍게도, 거창 골짜기 어인(於仁) 마을에서 태어난 저자와 운명적으로 연결된다. 근래, 자기 스스로인지 주변에서인지 학이사 주지 스님으로 칭하는 걸 듣기도 하는데 출판사..

감상글(책) 2022.07.04

집밥 / 권상진

집밥 / 권상진 혼자 먹는 밥은 해결의 대상이다 두어 바퀴째 식당가를 돌다가 알게 된 사실은 돈보다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 매일 드나들지만 언제나 마뜩찮은 맛집 골목을 막차처럼 빈속으로 돌아나올 때 아이와 아내가 먹고 남은 밥과 김치 몇 조각에 나는 낯선 식구이지나 않을는지 늦을 거면 밥은 해결하고 오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걱정인지 짜증인지 가로수 꽃점이라도 쳐보고 싶은 저녁 불편한 약속처럼 나를 기다리는 골목 분식집 연속극을 보다가 반갑게 일어서는 저이도 누군가의 아내이겠다 싶어 손쉬운 라면 한 그릇에 아내와 여주인을 해결하고 나면 어느새 든든해 오는 마음 한편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구내식당 저녁 내내 간절하던 집밥은 그래, 쉬는 날 먹으면 된다 -『눈물 이후』, 시산맥, 2018. 감상 – 삼대..

감상글(시) 2022.07.02

<에세이> 비가 내리는 날에는 여우가 되고 싶습니다

백우인, 『비가 내리는 날에는 여우가 되고 싶습니다』, yeondoo, 2022. - 시집 『쉼없이 네가 희망이면 좋겠습니다』를 썼던 백우인 시인이 연달아 노크하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산문집을 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여우가 되고 싶습니다』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고, 어린 왕자를 간직하고 지냈던 백우인 시인이 어린 왕자를 불러 세워서 대화한 기록이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어린 왕자 이야기에 여우의 마음으로 달아놓은 말풍선이란다. 그러니 백우인 작가의 책은 『어린 왕자』 사용법 성격도 있고, 『어린 왕자』 안의 이야기를 밖에서 끄집어내서 새로운 이야기를 보탠 것이기도 하다. 『어린 왕자』를 읽으면, 꽃을 떠나온 어린 왕자가 별에 날아온 꽃을 사랑스럽다고 여기면서 거리감도 느끼는 내용이 ..

감상글(책) 2022.06.29

<소설> 들끓는 사랑 , <소설> 돈키호테의 식당

김혜순, 『들끓는 사랑』, 학고재, 1996. 천운영, 『돈키호테의 식당』, 아르테, 2021. - 두 권의 책. 김혜순 시인과 천운영 소설가가 『돈키호테』를 들고 스페인을 여행한 기록이다. 김혜순 시인이 스페인 미술과 문학의 거장인 가우디, 고야, 피카소, 로르까의 흔적을 탐방하며, 죽음과 고통, 그 죽음과 고통을 치료하는 예술과 웃음과 풍자를 생각했다면, 천운영 소설가는 돈키호테에 언급된 음식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스페인 요리를 바탕으로 한 풍성한 음식 문화에 대해 시공을 넘나들며 자유로이 얘기한다. 『들끓는 사랑』에선 피카소를 찾아 바로셀로나 미술관에 간다. 십대 대 겪은 누이의 죽음, 스무 살에 겪은 친구의 죽음 등으로 피카소가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었다는 전기적 사실을 떠올린..

감상글(책) 2022.06.27

몽상가의 턱 / 김혜천

몽상가의 턱 / 김혜천 인사동 골목길을 걷다가 고미술품 노점상에서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아 비스듬히 턱을 괸 몽중사유상을 모셔왔다 몽상은 오직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뇌에 자극을 주어 유연하게 한다 굳어버린 일상 속에서 저 아래 먹이를 낚아채는 매의 세계를 보게 한다 간단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넘어 내 창에 걸터앉은 그대여 나를 바람 되게 하여 산을 날게 하고 바다를 걷게 하고 달을 베어 먹게 하고 꽃 이파리와 입맞춤하게 하고 고뇌하고 절망하였다가 다시 살아 시공을 넘나들게 하여 새로운 우주를 도모하게 하면서 몽(夢) 중에도 찾아와 내 영혼을 깨우는 그대여 나 이제 사는 날까지 그대 맞는 마중물 자리끼 놓아두려오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 시산맥, 2022. 감상 – 손으로 ..

감상글(시) 2022.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