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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공무원 라나 언니

임경란, 『공무원 라나 언니』, 한티재, 2021. - 공무원인 저자가 공무원으로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좀처럼 변하지 않거나 조금씩 변해가는 공무원 내부 사정 및 주변 분위기를 소개한다. 소통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면, 부서 간 갈등 조정이나 협조를 위해 소통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갖고 시도행정포털에 ‘소통’이란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었지만 아무도 글을 남기지 않아서 슬며시 없어졌다고 한다. 게시판 하나 생겼다가 없어진 다소 싱거운 이야기이지만 문화와 제도와 직장 분위기로 뒷받침되지 않은 ‘소통’의 끝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저자는 소통 부재의 원인을 생각한다. 개인의 사적 욕망이 공공심을 압도하는 고시 제도의 문제에 공감하며 고위직과 하위직을 연결하는 중간 간부의 역할에도 주목한다. “성과와 충성을 기..

감상글(책) 2022.05.15

배드민턴 / 천지경

배드민턴 / 천지경 밤늦은 시각 대폿집을 파장한 아줌마 셋 시든 배추 같은 몸을 일으켜 배드민턴을 친다 노동에 찌든 몸은 운동으로 풀어야 하지 몸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체력을 길러야 혀 다부진 몸매의 전주 댁이 내리 꽂히는 콕을 쳐 올린다 물살로 출렁거리는 밀양 댁은 한 번 쳐 올릴 때마다 방귀의 힘을 빌린다 가장 높이 떴을 때 몸을 낮추는 셔틀콕 엉덩이부터 내려야 날개를 다치지 않는다는 진리를 일찍부터 깨달은 영은 엄마는 베트남서 아버지 같은 남자한테 시집 온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리는 아직 젊은 돌배기 엄마 힘이 너무 들어가면 어깨 너머로 달아나버리고 팔이 약하면 맥없이 툭 떨어지는 하루하루 술만 들어가면 괴팍함을 부리는 손님처럼 치는 대로 순응하다 어느 순간 까탈을 부리는 셔틀콕 이 바닥서 돈 벌..

감상글(시) 2022.05.08

쓰러져가는 미술관 / 이상화

쓰러져가는 미술관 어려서 돌아간 「인순」의 신령에게 / 이상화 옛 생각 많은 봄철이 불타오를 때 사납게 미친 모-든 욕망-회한을 가슴에 안고 나는 널 속을 꿈꾸는 이불에 묻혔어라. 쪼각쪼각 흩어진 내 생각은 민첩하게도 오는 날 묵은 해 뫼 너머 구름 위를 더우잡으며 말 못할 미궁(迷宮)에 헤맬 때 나는 보았노라. 진흙 칠한 하늘이 나직하게 덮여 야릇한 그늘 끼인 냄새가 떠도는 검은 놀 안에 오 나의 미술관! 네가 게서 섰음을 내가 보았노라. 내 가슴의 도장에 숨어사는 어린 신령아! 세상이 둥근지 모난지 모르던 그날 그날 내가 네 앞에서 부르던 노래를 아직도 못 잊노라. 클레오파트라의 코와 모나리-자의 손을 가진 어린 요정아! 내 혼을 가져간 요정아! 가차운 먼 길을 밟고 가는 너야 나를 데리고 가라. 오..

감상글(시) 2022.05.05

하얀 예수 / 유성운

하얀 예수 / 유성운 보따리 서너 개 메고 오 남매 주렁 달고 마가리 화전민으로 쫓겨 온 일도 억울한데 마흔 나이에 덜컥 또, 뭘 먹여 키우라고 어매는 너덜겅 밭에 상소리 꽤나 뱉었다지요 호밋자루 뗑강 분지르고 돌밭을 구르며 아기씨 떼어 낸다고 시악을 부리기도 하고 빨랫방망이 내던지며 양잿물 퍼마시고 같이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한 날은 손이 곱고 눈물도 꽁꽁 언 겨울이었다지요 엄마는 내가 배 속에서 9개월이 될 때까지 산 넘고 넘어 예배당을 다녔는데요 죄송스럽게도 그 은혜로 세상에 태어났죠 기어 다닐 때부터 온종일 혼자 놀았어요 나는 방치되고 다들 마음은 콩밭에 있었죠 울다 지쳐 냇가까지 굴러가서 물을 마시며 울수록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닫게 되었죠 울음을 포기한 세월만큼 강인해졌지만요 어지러운 시대..

감상글(시) 2022.04.30

정릉 / 박병대

정릉 / 박병대 정릉 마당은 햇빛 없는 밝음이었다 날아온 까치 촐싹대며 꽁지깃을 까딱거리고 태풍 지나간 잠든 바람에 단잠 자는 나뭇잎 왕사(王沙)의 신음이 발밑에서 뿌드득거린다 서넛의 여인네 웃음소리 봉분으로 날아가니 외로운 신덕왕후 번쩍 눈뜨는 소리가 났다 돌아앉아 교교히 흘러 낙차하는 도랑물 바라보니 가는 길 묻지도 않고 하는 이야기 귀 기울이니 낮은 사랑을 하라고 한다 낮은 생명 보듬고 맑은 숨 쉬라고 한다 슬퍼지면 저처럼 노래하라고 한다 평생의 부끄러움이 도랑물처럼 밀려왔다 도랑 건너편 석벽에 눈 맞추니 돌 위에 앉은 돌이 윗돌 받침 되어 받침이 받침으로 결속된 돌들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한 몸에 지닌 아름다운 믿음과 신뢰의 인드라망이었다 발아래 개미는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푸른 별의 역사는..

감상글(시) 2022.04.21

고래의 생활난

고래의 생활난 / 신휘 한 봉에 칠백 원짜리 안성탕면을 생으로 입에 넣고 씹다 보면 삶이, 그것이 마젤란 해협의 그것처럼 길고 멀게 느껴지지 허나 허기진 배에 물이라도 한 사발 들이켜고 나면 희망이, 그것이 아프리카 최남단의 흰수염고래처럼 금세 부풀어 오른다 꼬로륵 꼬로륵 며칠 동안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배앓이 하다 보면 마침내 눈에 뵈던 헛것이 걷히고 세상 물빛이 달리 보이는 건, 내 안에 거대한 고래가 살고 있기 때문 그런 날이면 꼭 사달이 났다 보일 듯 말 듯, 그럼에도 하늘과 바다를 경계로 교묘히 헤엄쳐 온 고래의 생활난은 웬만해선 파도 앞에 자신의 배를 뒤집어 물 밑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 이따금 수면 위로 핍진한 가계의 밥 짓는 연기만 피워 올릴 뿐 다시 먼 바다로 나아간 고래는 한동안 ..

감상글(시) 2022.04.13

장끼를 쏘다 / 정형무

장끼를 쏘다 / 정형무 어느 봄날 홀로 활 쏘다 장끼 한 마리 날아들어 문득 그를 겨냥하였다 오방색 아리따움을 향한 화살은 무겁* 언저리에 꽂히고 말았는데 죽음을 면한 꽁지깃들이 산당화 그늘 아래 헌사로웠다 두 번째 살을 먹이다 말고 나는 외면하고 그는 두리번거려 불안이 서로를 관통하였는데 빗나가는 게 때로는 잘 된 일 자칫 피를 보았을 것이다 가만히 활을 접으며 한숨 쉬기를 쏜 살의 달음질도 내빼던 날갯짓도 시속 십만칠천 킬로미터로 움직이는 지구 구물거리는 생명들 위로 쏟아지는 별똥별처럼 가없는 엔트로피*만 더해가는 헛된 몸짓일 테니 * 무겁: 활터 과녁 뒤 흙으로 둘러싸인 곳 -『닭의장풀은 남보라 물봉선은 붉은보라』, 우리시움, 2021. 감상 – 엔트로피가 트로피 종류인가 싶기도 할 텐데, 시인이 ..

감상글(시) 2022.04.07

<에세이> 나는 괜찮습니다 당신도 괜찮습니다

임미리, 『나는 괜찮습니다 당신도 괜찮습니다』, 문학관, 2020. - 화순 하면 천불천탑의 운주사가 우선 떠오르지만 그곳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지역과 자신과 주변 이야기를 수필로도 쓰고 시로도 쓰는 임미리 작가가 또 생각난다. “토끼가 입을 맞춘다는 산골짜기에서 태어났다”는 임미리 작가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궁이에 직접 불을 지핀다. 농사일에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밥을 하고 반찬 장만도 거든 것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라디오도 없는 곳에서 자연히 노래란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초등 2학년 때 애국가를 가창하라는 숙제를 가사만 외워 자기 식으로 낭송하다가 망신을 당한 후 작가는 남 앞에서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제대로 듣는 훈련이 안 되니 들은 것을 소리로 낼 수 없..

감상글(책) 2022.04.03

봄은 전보도 안 치고 / 김기림

봄은 전보도 안 치고 / 김기림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말 없는 산허리를 기어오는 차 소리 우루루루 오늘도 철교는 운다. 무엇을 우누. 글쎄 봄은 언제 온다는 전보도 없이 저 차를 타고 도적과 같이 왔구려 어머니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골짝에서 코 고는 시냇물들을 불러일으키면서……. 해는 지금 붉은 얼굴을 벙글거리며 사라지는 엷은 눈 위에 이별의 키스를 뿌리노라고 바쁘게 돌아다니오. 포플러들은 파-란 연기를 뿜으면서 빨래와 같은 하-얀 오후의 방천에 늘어서서 실업쟁이처럼 담배를 피우오. 봄아 너는 언제 강가에서라도 만나서 나에게 이렇다는 약속을 한 일도 없건만 어쩐지 무엇을-굉장히 훌륭한 무엇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아서 나는 오늘도 괭이를 멘 채 돌아서서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

감상글(시) 2022.04.02

<에세이> 먼 길,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

박수자, 『먼 길,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 창조와지식, 2021. - 『나는 B급 작가다』란 시집을 내기도 했던 작가의 산문집. 표제가 된 시를 검색해보니 시를 쓰면 쓸수록 돈이 든다면 B급이란다. 문학 주변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읽힌다. 또 어떻게 보면, 유력 잡지에 청탁 받는 시인은 제한적이고, 원고료까지 받는 시인은 더 드문 걸 보면 세상은 이미 B급이 주류가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칭이든 타칭이든 유명세에 값한다고 부담을 안고 있을 부류보다는 할 말 다하는 B급이 더 낭만적 호칭으로도 들린다. 작가는 서문에서 모든 결핍이 힘이 되었다고 적는다. 특히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상처와 결핍이 유난하다. 아홉 살 아이가 다리가 불편해서 걷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심코 듣게 된 아버지의 말이 비수가..

감상글(책) 2022.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