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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룩취나물 / 허림

어수룩취나물 / 허림 미역취 미나리싹 쑥 어수리를 뜯고 산비탈에서 두릅 따다 들켰다. 거기서 내려오세요. 왜요? 내려오세요. 당신 거 아니잖아요. 그럼 당신 건가요? 네. 미안해요. 몰랐어요. 내 것 아니면 손대지 말아야죠. 어서 내려와요. 혼내실 건가요? 그럼 안 내려갈래요. 왜요? 혼내실 거잖아요. 일단 뜯은 거나 봅시다. 그냥 보내줄 거죠? 내려와서 얘기하자구요. 내려오면서 그 뒤에 있는 두릅 두 개도 따가지고 내려오세요. -『다음이라는 말』, 달아실, 2023. 감상 - 헷갈리는 식물 이름이 한둘일까 마는 그중에서도 산형과 식물이 더 그렇다. 산형과는 꽃대의 끝에서 많은 꽃이 방사형으로 뻗은 모습인데 미나리, 뚝갈, 구릿대, 바디나물, 등골나물, 어수리 등 국내에서만 80여 종을 이룬다고 한다. ..

감상글(시) 2024.03.16

오래된 칼 / 이향지

오래된 칼 / 이향지 부엌에 있습니다. 부엌칼입니다. 날 끝에서 손잡이까지 5촌쯤 됩니다. 제 날은 두껍습니다. 손잡이가 헐거워져 부목을 대고 칭칭 철사를 동였습니다. 여기저기 이빨이 빠지고 긁힌 자국들이 자우룩합니다. 제겐들 왜 촌철살인의 의지 없겠습니까? 저는 죽은 고기들이나 썹니다. 죽어서 부뚜막까지 밀려온 것들이 무덤의 문턱을 먼저 알아봅니다. 날렵한 날을 섬광 속으로 디밀고, 눈앞의 공기를 썩썩 베며 번쩍이고 싶은 욕망, 제겐들 왜 없겠습니까? 제 날은 무겁고 짧습니다. 죽은 고기들이 투박한 날을 이리저리 피하며 애를 먹일 때마다 남은 날을 가혹하게 칼갈이에 들이댑니다. 오른손으로는 칼을 잡고 왼손으로는 칼갈이를 잡고 이날 저 날 뒤집어가며 쓱쓱 문질러 이 빠진 날들을 일으켜세우는 겁니다. 제 ..

감상글(시) 2024.03.07

<파묘>

영화 (장재현 감독, 2024))를 봤다. 일본의 미래를 걱정하는 나라무당이 친일파 무덤 밑에 침략전쟁 영웅의 관을 함께 쓰고, 우연찮게 이 땅의 민간 무속인들(무당, 박수무당, 지관, 장의사)이 그 의도를 꿰뚫고 독립군처럼 저항하는 이야기다. 좌파 영화란 소문을 듣고 보았더니 이런 우파 영화가 없다. 민족적인 시각이 나쁠 건 없지만 나라와 이념을 떠나서 전쟁으로 고통받았던 현실에 대한 묘사가 있었으면 좌파 영화로 불러도 좋았을 것이다. 어쨌든 영화는 시종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풍수와 묏자리를 보는 장면, 무당굿 장면 등이 어울려 민속학적인 공부도 제법 된다. 집에 와서, 사진집 (열화당, 2017)을 펴본다. 김수남 작가는 굿 장면을 주로 찍어서 사진박수로 불리기도 했던 인물인데, 생전에 방송에서..

감상글(영화) 2024.03.03

우체국에 가면 / 신정일

우체국에 가면 / 신정일 아무도 밟지 않은 길마다 눈 내리고 잠시 멎었다가 다시 퍼붓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휘젓고 지나갈 때마다 산자락에서 하얀 송홧가루 날리고 나무마다 하얗게 하늘 바라기를 하는 섬진강 강물이 여울져 흐르다가 다시 잠잠해지는 강가에서 겨울의 소리인가 봄의 소리인가 모를 낌새를 느끼다가 적성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가 창구에 앉은 여자분에게 물었다 삼십 년 전인가 이십여 년 전이던가 맡겨둔 걸 찾으려고 왔습니다 똥그란 눈으로 묻는 여직원, 예금인가요? 아니요, 그리움입니다 잊으면 안 될 그리움을 맡겨두었거든요 그제야 빙긋이 웃던 그 여직원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꿈,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소망을 찾을 수 있을까? ㅡ『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 작가, 2023. 감상 – 위 시의 한 구절처..

감상글(시) 2024.02.26

<에세이> 동네 책방 분투기

박태숙 강미, 『동네책방 분투기』, 학이사, 2023. ㅡ『동네책방 분투기』의 저자는 책방지기 박태숙과 소설가 강미다. 두 사람은 울산에서 국어교사로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있다. 경주 외곽이고 울산 북쪽인 산마을에 책방을 낼 궁리를 박태숙 선생이 하게 되자 평소 함께 나눌 문화공간의 꿈을 간직한 강미 선생이 응원을 해온 것이다. 책방 홍보도 겸해서 책방 설계와 진행 또 그 운영 상황까지 공유함으로써 비슷한 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끔 하자는 데 두 사람은 의기투합한다. 그 결과로 나온 책이 『동네책방 분투기』다. 책방 이름인 는 책방지기, 카페지기로 역할을 분담한 아내와 남편의 이름을 살려서 호칭한 걸로 보인다. 코로나를 지나며 여섯 해를 이어오고 있는 책방엔 여러 인연들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감상글(책) 2024.02.19

<에세이> 일흔에 쓴 창업일기

이동림, 『일흔에 쓴 창업일기』, 산아래 시, 2023. -대구 앞산공원 쪽에 은적사가 있고, 그 옆자락에 안일사가 있다. 그 중간쯤 산 아래 남부도서관이 있고 큰길 건너편 카페골목 초입에 시집 전문 책방인 ‘산아래 시’가 있다. 『일흔에 쓴 창업일기』는 책방지기인 저자가 시집 전문 책방을 개업하기까지의 준비 과정과 운영의 묘를 밝히고 그 사이에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간명하게 기록해 놓은 책이다. 왜 하필 시집 전문 책방인가 하는 의문엔, 독자를 만나지 못하는 시집에 대한 안타까움이 시집 전문 책방으로 이어지게 된 거라고 말한다. 차 안에 늘 시집을 갖고 다니고 읽은 시집을 선물하는 평소의 태도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저자는 우연히 읽은 시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때로 죽비로 내린다고..

감상글(책) 2024.02.16

애써 아닌 척 / 유은희

애써 아닌 척 / 유은희 다른 색을 칠했다고 네 맘이 숨겨지겠니? 옆구리에 작은 벨까지 차고 안 기다린 척은 몇 번을 고쳐 채운 자물쇠 자국 좀 봐 이미 너도 흔들리고 있었잖아 ㅡ『수신되지 않은 말이 있네』, 애지, 2023. 감상 – 아닌 척 긴 척. 이때 ‘척’은 그럴듯하게 꾸미는 거짓 태도나 모양을 일컫는 말이니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가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전적 의미는 분명 그러하지만 진실이란 게 뚜렷하고 적확한 형태로 있는 게 아니다 보니 한 쪽이 분명하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 오히려 불편해지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두려움을 이겨내며 언제든 진실 편에 서려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헌신이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꾸어 왔다고 믿지만 그 반대편 사람들도 자신을 진실의 편이라고..

감상글(시) 2024.02.14

동네 의원 / 윤복진

동네 의원 / 윤복진 우리 동네 차돌이 의원이라오. 동네 안에 이름 난 의원이라오. 앞담 밑에 흙 파서 가루약 지어, 풀이파리 따다가 싸서 주어요. 동네 애들 병나면 솔잎침 놓고, 약 한 봉지 써 주면 당장 나아요. -『꽃초롱 별초롱』, 아동문예예술원, 1949/ 창비, 1997 감상 – 아동문학가 윤복진(1907〜1991)의 삶과 인간관계를 짚어볼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은 가운데, 2022년 윤복진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던 상당한 자료가 대구시에 기증되었고 현재, 대구근대역사관에서 ‘동요의 귀환’이란 이름으로 윤복진 기증 유물 특별전(2024.1.30.〜3.31)이 이어지고 있다, 여느 때보다 윤복진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지만 윤복진 삶과 그 시대를 함께 조망하는 작업들은 더뎌 보인다. 먼저 동시 한..

감상글(시) 2024.02.11

간이역 같은 집을 하나 갖고 싶다 / 강인호

간이역 같은 집을 하나 갖고 싶다 / 강인호 조용한 시골 어느 마을에 간이역 같은 집 하나 갖고 싶다. 미운 사람 고운 사람 모두 쉬어 갈 수 있는 양옆으로 늘어지는 감나무 아래 평상을 두어 잠시 여유를 부리면 누구든 햇살 가득 담은 앞마당에 발 담그고 싱그런 바람에 앞 단추 몇 개는 풀어 젖히고 바짓가랑이 둘둘 말아 올린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앉아있어도 누워있어도 좋다. 가슴 가득 푸른 산이 서늘하고 파란 하늘에선 몽실몽실 구름이 동화를 쓰는 아무런 생각 없이 너도 아이처럼 웃어볼 수 있으리. 야트막한 뒷산엔 오솔길도 여러 개 열어 놓을 것이다. 갓난아이 손톱만 한 들꽃들이 구석구석 지천으로 널리고 바람에 자지러지는 풀잎들 방울방울 떨어지는 햇살에 찰랑찰랑 소리를 내면 아무런 생각 없이 너도 꽃처..

감상글(시) 2024.02.03

검정말 / 김경성

검정말 / 김경성 ​ 갈기가 흔들릴 때마다 약속처럼 나도 흔들린다 ​물 밖은 위험해 솟구쳐 오르는 욕망을 물방울 하나로 누르며 멀리 나가고 싶은 마음마저 내려놓고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갈기를 키우는 말은 암막 커튼을 걷어내고 발굽 아래로 흘러가는 길의 지류를 이마에 붙이는 일이라고 ​생이가래, 붕어마름, 올챙이솔, 쇠뜨기말, 솔잎가래, 물수세미······ 그 사이에서 떼로 자라는 검정말은 달리는 말이 되었다가 물속 말이 되었다가 ​토슈즈를 신은 왕버드나무도 치마를 한껏 펼치고는 호수 속으로 뛰어 들어가 검은 말을 타기도 하고 검은 물풀이 되기도 하는 가을 한낮 ​당신은 안녕하신가 안부를 묻는 듯 물고기 떼를 품고 있는 검정말의 갈기가 흔들린다 - 『모란의 저녁』, 시인동네, 2023. 감상 – 검정말..

감상글(시) 2024.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