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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버릇 / 심수자

쥐버릇 / 심수자 뚫어놓은 수챗구멍에서 느닷없이 고개 내민 쥐가 웃는다 아차, 지난겨울 잊고 있었던 윗목 고구마 자루를 여니스르르 끌려 나오는 반세기 전 기억 하나젖이 모자라 낑낑대던 세 살박이 막내는 한밤중 캄캄한 어둠 속에서고구마 양손으로 잡고 생쥐처럼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그때 벗겨 낸 껍질은 흩어지는 마른 울음 같아서얼굴 늙어 가며 듬성듬성 생겨난 검버섯주렁주렁 고구마 매단 넝쿨이 당겨져서언니 언니 나를 부른다 일찍이 본능의 씨눈을 삼킨 아이는철든 후에도 자주 손톱을 물어뜯고 하였다 가늠 되지 않던 생의 골짜기에서도 이빨만큼은 언제나 빛났다빠져나가라고 뚫은 수챗구멍에서내 눈으로 건너온 쥐는 앞니 유난히 하얀 소설이 되어갸우뚱 엿보던 나의 비밀을 갉고 있다 - 『술뿔』, 책나무, 2014.  감상 ..

감상글(시) 2024.05.15

눈물로 지켜야 하는 것 / 류흔

눈물로 지켜야 하는 것 / 류흔 정조는 지켜야 하는 것이다궁녀로부터 정조를 지킨호위무사도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이 점은 나의 신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 여러 애인과상통하지 않겠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밤에그러니까 억수로 취한 밤에어쩌지 못하고 당하던 그 밤에호위무사 한 명 없는 처지를 한탄하며 꺼이꺼이 동틀 때까지 나는 울었다달리아 비누 냄새와 뒤집어진내복에 관해 추궁받기 전에다락같은 가마 속으로 숨어들어광화문에서 화성(華城)까지 정조와 함께 수백 년을 흔들리고 싶었다나오라!성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아내여성문은 절대 열지 않으리먼 훗날 성이 허물어져단란했던 돌이 틀어지고바람에 흩어져 모래가 될지언정나는 마음의 순결을 피력하리지켜야 하는 생활과지켜야 하는 밤과지켜야 하는 역사를 생각하면 아으눈물이 앞을 ..

감상글(시) 2024.05.06

<에세이> 빈방의 빛: 시인이 말하는 호퍼

마크 스트랜드(박상미 역), 『빈방의 빛: 시인이 말하는 호퍼』, 한길사, 2007.- 호퍼(1886〜1967)의 그림은 미국 도심과 그 안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본때 나는 도심 풍경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황량하고 적막한 정서를 풍기는 쪽이 많다. 호퍼는 당대 혹은 이후의 화가들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작가 등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많이 준 화가로도 손꼽힌다.이 책을 쓴 시인인 마크 스트랜드(1934〜2014)와 번역가인 박상미도 호퍼의 팬이다. 스트랜드의 『변방의 빛』은 호퍼의 여러 그림에 대한 자기 인상을 밝혀 적은 글이다. 호퍼의 전기를 기대했다면 다른 책을 구하는 게 나을 테고, 그림을 이렇게 봐도 되는구나 하는 쪽에 관심이 있다면 유용한 독서가 될 것이다.비치는 이층집>(1960)은 정장 차림의..

감상글(책) 2024.04.28

<에세이> 좋은 삶을 위한 인문학 50계단

권오현 등, 『좋은 삶을 위한 인문학 50계단』, 한티재, 2015. - 『좋은 삶을 위한 인문학 50계단』은 5인의 인문학자가 각 10권씩 권하는 고전 50선에 대한 소개 글이다. 경산신문>에 연재되어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것을 책으로 엮게 된 것이다. 문학, 역사, 동양철학, 서양철학, 예술을 망라하는 50권 전체를 읽을 수만 있다면 인문 교양과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개인의 생각도 한층 깊어지고 새로워질 것 같은데 한 권 읽는 데도 큰 결심을 해야 하는 입장에선 마음먹기가 쉽지 않은 과제다. 이때 50권의 엑기스 혹은 안내서 역할을 십분 하고 있는 이 한 권을 우선 읽는 것도 괜찮은 선택지로 생각한다.   문학 쪽의 권오현 쌤은 『임꺽정』(홍명희), 『레 미제라블』(빅토르 위고) 등을 ..

감상글(책) 2024.04.26

<소설> 빨치산의 딸

정지아, 『빨치산의 딸』, 실천문학사, 1990. - 정지아 작가의 글은 『천국의 이야기꾼, 권정생』을 먼저 읽었고,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나중에 읽었다. 한참 후에야 두 책의 작가가 동일한 인물이란 걸 알게 된 바 있다. 나라 위해 애쓰는 애국자로 인해 전쟁이 있을 것 같으면 도리어 그런 애국자가 없는 평화가 낫다고까지 역설했던 권정생 선생은 전쟁으로 인해 선량한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걸 누구보다 아파했다. 동화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편들어주는 권정생에게 정지아는 자신의 부모 모습을 보았을 성싶기도 하다. 작가의 부모는 빨치산이다. 아버지는 전남도당조직부부장 출신이고, 어머니는 남부군 정치지도원을 지냈다. 부부는 해방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의 시기에 지리산, 백아산 일대에서, 계급 없이 다 같..

감상글(책) 2024.04.14

매듭 / 한상호

매듭 / 한상호 홀쳐매지 마라 다시 풀기 어려우니 해결이란 묶인 것을 푸는 일 화해란 풀리고 녹아 물로 흐르는 일 분노한 손으로는 매듭짓지 마라 잘 풀려야 잘 묶은 매듭이니 -『어찌 재가 되고 싶지 않았으리』, 책만드는집, 2023. 감상 – 매듭을 잘 짓고 싶다. 누구든 그러할 것이다. 한때는 단단하게 매듭짓는 것이 매듭의 존재 이유에 충실한 것이라 여기고 남보다 성의껏, 잘 잡아매는 것이야말로 실속 있는 태도인 양 여겼다. 삶의 태도도 그렇다. 맺고 끊는 것을 잘하지 못하는 것을 인간적 결함으로 보는 시각이 적잖다. 결정을 미룬 채, 딱 부러지게 매듭짓지 못하는 것을 두고 우유부단하다고 스스로 자책하고 남도 나무란다. 시인은 이러한 인식을 애써 부정하는 대신 매듭의 또 다른 면을 통찰해서 우리에게 들..

감상글(시) 2024.04.14

331미터 앞 막국수집 / 강만수

331미터 앞 막국수집 / 강만수 331미터를 천천히 걸어가 막국수집에 들렀다 그 길은 평탄한 길이다 331미터는 어떨 땐 가깝게 여겨지지만 근거리라고 생각되지 않고 331미터는 멀다 아주 멀게 느껴졌다 7월 14일은 매우 흐린 뒤 비가 내린 날이었지만 손에 쥔 방울토마토 11개를 씹으면서 걸어갔다 길가 어느 집 담장 안 빨랫줄에 걸어놓은 빨간 셔츠와 노란 셔츠가 바람에 펄렁인다 그 집을 펄렁이는 난닝구와는 관계없이 지나간다 집 앞엔 흰 고양이와 검정고양이가 비를 피하고 있다 걷고 또 걸었지만 331미터는 줄어들지 않고 331미터는 3311미터처럼 느리게 다가온다 그러다 어떨 때는 331미터가 3311미터처럼 생각됐다 여름엔 그 길이 멀다고 느꼈지만 가을엔 당겼다 놓은 고무줄처럼 가깝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감상글(시) 2024.04.01

적막한 하루 / 천영애

적막한 하루 / 천영애 적막한 하루였습니다 주책없이 까치집 짓는 것에 참견하고 싶었습니다 위로만 올라가는 까치 불러 굴뚝 낮은 어디쯤 바람 피하기 좋은 어디쯤 집 지으라고 참견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색시 구해야 숭덩숭덩 알을 잘 낳는지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굴뚝 여기저기 헤매는 까치 보다가 바람의 일에도 참견하고 싶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날은 조용조용하게 다닐 것 자리 찾지 못하는 까치집 흔들리지 않도록 조용조용 지나갈 것 길 내고 싶다면 좀 멀긴 하지만 돌아가라고 참견하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적막하여 내리는 눈에게도 말 걸고 싶었습니다 그대가 다녀온 길 고요하였는지 이 밤에 무슨 일로 적막한 도시 왔는지 적막한 하루였습니다 종일 뒤적이던 문자를 눈과 버무려 여기저기 던져 놓으면 말이 될까요 그 말에 적막의 냄..

감상글(시) 2024.03.27

한 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 손현숙

한 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 손현숙 비 오는 날 빨간 구두를 신는다 골목을 기웃거리는데 창문마다 작은 쇠종을 매달았다 소리 속에서 소리가 이어졌다, 끊어졌다, 세상에서 이름을 찾다가 세상 밖으로 미끄러진 아이는 어디 가서 저를 찾아와야 하나 굽이 닳아서 발목까지 사라지는 꿈, 따뜻하고 말랑한 구름을 입에 물고 이 없는 잇몸으로 오물거리는, 여기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뱃바닥으로 기어서 달빛까지 닿으면 길이 끝나는 걸까 누가 나를 부르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팔목을 저으면서 따라오는 빨간 구두는 언젠가 만났던 얼굴이다 오늘은 종일 비가 오고 그 비를 다 걷고 나서야 쇠종처럼 흔들리는 내가 보인다 - 『멀어도 걷는 사람』, 리토피아, 2023. 감상 – 카렌이란 친구는 단정해 보이는 검은 구두 대신에 빨간 구..

감상글(시) 2024.03.24

<역사소설> 연산의 아들, 이황

강기희, 『연산의 아들, 이황(김팔발의 난)』, 달아실, 2020. 강기희 작가는 오지 마을인 정선 덕산기 계곡에 숲속 책방을 열어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강기희 작가로서는 고향마을로 돌아온 것이며 여기에 아내인 유진아 동화작가가 뜻을 같이해 준 것이다. 텔레비전으로도 몇 번 소개되어 강기희 작가의 소설책 한 권 읽고 가본다는 게 때를 놓쳤다. 작가는 지난여름 유명을 달리했다. 『연산의 아들, 이황(김팔발의 난)』은 『연산』(화남출판사, 2012)을 복간한 것이다. 연산은 광해와 함께 왕으로 재임했으나 실권 이후 끝내 복권되지 못한 왕이다. 그나마 광해는 임진왜란에서의 역할, 실리 외교 등에서 점수를 얻어 상당 부분 재평가가 이루어진 반면에 연산은 폭군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다. 그 배경엔 무오사화,..

감상글(책) 2024.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