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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그 나라의 역사와 말

백승종, 『그 나라의 역사와 말』, 궁리, 2002 -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는 아주 특별한 학교다. 이승훈이 안창호의 영향 아래 1907년 오산학교를 설립한 이래 김소월과 백석이란 천재 시인과 화가 이중섭, 사학자 함석헌 등을 배출한 학교다. 조만식과 유영모가 교장을 역임했고, 이광수, 김억, 염상섭, 임용련 백남순 화가 부부가 교사로 재직했던 곳이니 그야말로 문화예술의 산실이다. 백승종 저자는 김소월, 백석 등 문인 예술가 대신 오산학교 출신의 이찬갑(1904-1974)이란 인물에 주목하면서 관련 인물인 이승훈, 함석헌, 김교신 등의 활약을 조명한다. 이찬갑은 풀무학교(1958-) 건립자이지만 다소 잊힌 이름일 수도 있겠는데 우연히 그가 남긴 신문스크랩북과 기사 옆에 메모해둔 글을 보게 된 것이 이 책..

감상글(책) 2024.07.03

달팽이 고리 / 신순임

달팽이 고리 / 신순임 소장가치 따질라치면 골동품점 가야겠지만한 시절 엄마 손에 놀아나던 것들이라눈요기로 행복지수 높이기에 이만한 것 없어일부러 들러 보는 안강장달아오른 아스팔트 위 목마름 잊고 모로 누워새 주인 기다리는 민속품 중녹슬고 때 눌어붙은 달팽이 고리돌돌 말은 몸속까지 햇빛 밀어 넣고말라버린 촉수에 기 모아누군가 알아봐 주길 고대하는데여인네들 잠자리 들기 전한옥 문고리에 숟가락 꽂던 때돌쩍 빼지 않는 한 열 수 없는 잠금쇠로쇳대도 필요 없이 요긴했지만디지털 도어락이 집 지키는 세월맘만 먹으면 열 수 있는 쇠붙이아무도 알은척 않으니스스로 달구어 가는 열기 범접할 이 없네 -『탱자가 익어갈 때』, 스타북스, 2023. 감상 – 신순임 시인은 양동마을 회재종택인 무첨당 안주인이다. 시의 양식을 빌려..

감상글(시) 2024.06.24

<에세이> 한국인의 고유 신앙: 영등・수목・칠성

김준호(손심심 그림), 『한국인의 고유 신앙: 영등・수목・칠성』, 학이사, 2023. - 저자는 소리꾼 김준호 쌤이다. 방송 출연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재담가이기도 하지만 그 재담의 바탕엔 민속학을 전공하면서 관련 공부를 계속해온 학자의 역량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 이번 책은 영등 신앙, 수목 신앙, 칠성 신앙을 깊이 파고든 결실이다. 음력 2월의 비바람을 관장하는 영등할미의 존재는 제주 이어도가 뿌리로 작용하고 있음을 여러 문헌과 설화를 궁구해가면서 얘기한다. 이어도는 여인들이 사는 곳이란 전설도 있고 거꾸로 바닷일 나갔다가 죽은 남편들이 사는 곳이란 전설도 있다. 파랑도라 불리기도 했던 암초 섬을 실제 답사하여 1951년 이어도란 동판 표지를 한 사실도 저자는 소개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을 기초로 ..

감상글(책) 2024.06.20

종달리 수국을 생각하는 밤 / 박숙경

종달리 수국을 생각하는 밤 / 박숙경 카페인에 덜미를 잡힌 잠이 잔금 투성이다낄낄대며 날뛰는 초침들 방안을 휘젓는다엎드렸던 적막이 뒤채다 흩어진다 가랑이 사이의 노묘(老猫)색 바랜 분홍 코를 앞발로 감싸고뒷다리를 한껏 잠 속으로 뻗고 있다나는 누운 채 분침처럼 천천히등을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춘다 짚은 손보다 이마가 싸늘하다, 나는 흘러든다 괜히 손가락이 가려운오늘 밤을 어디에 둬야 할까 나를 스쳐간 별의 이름은 무엇일까허기졌던 시간들을 비켜가는 방법으로 네가 왔을까이쯤이면, 꼬리가 꼬리를 무는 꼬리의 시간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나름 살아 있음을 알리는 둥근 등과 긍정적인 고요와 자정의 모퉁이를 넘어와 반비례인 쓸쓸함 문득 나에게 다가왔던 말과내게서 멀어져간 것들을 떠올리며비바람 치던 종달리를 생각한..

감상글(시) 2024.06.13

<산문> 미오기전

김미옥, 『미오기傳』, 이유출판, 2024.   재야의 고수로 주목받던 김미옥 작가는 두 권의 책을 약간의 차이를 두고 출간했다.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쓰다』는 책 이야기를 매개로 한, 세상 읽기가 아닌가 싶고, 『미오기전』은 주요 장면 위주로 그것도 슬픔과 낙담의 기억이 있던 곳을 찾아가되, 그 안에 웃음과 위로의 정서가 스미게끔 정성을 들인 글이다. 『미오기전』 서문 말미에 아픈 기억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책을 읽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 책이 아프거나 나쁜 기억에 대한 부정만 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흔히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오히려 자신과 주변을 깊이 성찰하는 계기도 되지 않냐고 말한다. 지금의 상처가 더 나은 삶의 밑거름이 되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 보듬는 삶으로 나아가게..

감상글(책) 2024.06.07

꽃바퀴 / 이윤경

꽃바퀴 / 이윤경 똑같이 생긴 자동차 바퀴를 뽑아내고그 자리에다 좋아하는 꽃잎을 끼워요자동차가 속도를 내면팽팽해진 꽃잎은 빙그르르 돌아요꽃잎을 끼운 자동차 꽁무니에선 꽃향기가 나지요도로는 꽃밭이 되구요급하게 끼어드는 자동차도빵빵거리며 화내는 사람도 없어요앞차 꽃냄새 맡으며 살살 달려요아빠 차 바퀴는 구름 같은 수국이구요옆집 아저씨 트럭은 힘찬 박태기꽃이구요 나중에 내 차를 가지면노랗게 와글거리는 산수유꽃을 끼울 거예요 -이윤경 동시, 나다정 그림, 『담쟁이는 문제를 풀었을까요?』, 브로콜리숲, 2002. 감상 – 이윤경 시인의 「꽃바퀴」를 읽으니 꼬마 자동차 붕붕도 자연스레 추억된다. 꼬마 자동차 붕붕은 1985년 제작된 일본 애니메이션이고 그해 한국에서도 방송된 바 있다. 붕붕은 휘발유나 전기로 가는 ..

감상글(시) 2024.06.03

<산문> 강의실 밖으로 나온 영시1

여국현, 『강의실 밖으로 나온 영시1』, 우리시움, 2024.  저자는 영문학을 가르치며 시를 쓰는 사람이다. 저자가 월간 《우리시》‘영시해설’코너에 발표해온 것을 『강의실 밖으로 나온 영시』두 권으로 묶어냈다. 단순한 시 해석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주목할 만한 사건, 작가의 삶과 에피소드를 덧붙이고 시의 행간 그 이면 내용까지 짚어가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니 한 꼭지를 읽어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강의실 밖으로 나온 영시1』에 소개된 21편의 영시 중 저자가 애증 관계로 여기로 있는 매슈 아놀드(1822∼1888)의 「마가렛에게­속편」을 본다. 교육자이기도 한 매슈 아놀드는 “문학비평과 공교육을 통해 사라진 ‘교양’을 회복하는 동시에 사회의 ‘속물근성’을 타파하는 데 관심”을 둔 인..

감상글(책) 2024.05.30

역전 사진관집 이층

역전 사진관집 이층 /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었다.한밤에도 덜커덩덜커덩 기차가 지나가는 사진관에서낙타와 고래를 동무로 사진을 찍고 싶었다.아무 때나 나와 기차를 타고 사막도 바다도 갈 수 있는,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을 그 먼 곳에 갈 수 있는,어렸을 때 나는 역전 그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었다. 이제는 꿈이 이루어져 비행기를 타고사막도 바다도 다녀봤지만, 나는 지금 다시그 삐걱대는 다락방에 가 머물고 싶다.아주 먼 데서 찾아왔을 그 사람과 함께 누워서덜컹대는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 소리를 듣고 싶다.낙타와 고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 다락방을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싶다.그 사람이 날 찾아온 길을 되짚어가면서어두운 그늘에도 젖고 눈부신 햇살도 쬐고 싶다...

감상글(시) 2024.05.24

측백나무 수문장 / 이상열

측백나무 수문장 / 이상열  집 앞을 지키는 수문장 둘 있다10년도 더 부렸지만 월급 한번 주지 않았다이를테면 고용승계라 할 수 있는데가타부타 말이 없다상냥한 미소나 친절한 인사 그런 건 바라지도 않지만기분 좋게 취한 날이나 더럽게 취한 날, 더러멱살 잡고 삿대질 해댄 적 있었다 볕뉘 고운 어느 해 봄낮술에 취해 “야! 목석 같은 자슥아!” 할 때도아지랑이 바람에 간들간들 알 수 없는 표정만 짓거나 작달비 쏟아지던 여름밤 한마디 대꾸도 없이 폭풍 주사(酒邪)를 다 받아주고귀때기 시퍼렇게 한설이 몰아치던 섣달그믐서럽게 길던 소울음도 어제 일인데 짙은 민무늬 전투복은 어디 가고해지고 바랜 누추한 근무복 입고꼿꼿하게 기립해 있는 화분 속측백나무 두 분(盆) “근무 중 이상 무!” -『세 그루 밀원』, 애지, ..

감상글(시) 2024.05.21

<에세이>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이재동,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학이사, 2023. - 서문이 아름다운 글로 소문난 이재동 변호사의 책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를 읽으니 서문은 아름답고 본문 또한 배움을 주는 아름다운 글들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의 성장사를 쓴다. 고향을 떠나 우연찮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병원 근처의 학교를 졸업하게 된 사연, 이청준의 『눈길』과 오버랩되는 모자의 사연이 먹먹하고 아름답게 읽히는 건 개인의 특별한 사연뿐만 아니라 이를 문장으로 풀어내는 저자의 문체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건조한 법의 언어를 떠나 술술 잘 읽히는 문체를 구사하는 솜씨는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책 목록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저자는 사회, 경제, 인문을 망라하는 독서 경험에 시집을 늘 읽고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첫..

감상글(책) 2024.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