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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시인의 초상

김영태, 『시인의 초상』, 지혜네, 1998. ㅡ김영태 시인은 시인의 초상을 즐겨 그린 화가이면서 음악과 무용에 깊이 천착하여 춤 평론의 장을 연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시인의 초상』은 시인의 인물 소묘와 함께 시인의 시와 주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연에 따른 김영태 자신의 소회를 덧붙인 대목도 잦다. 자신과 재주가 비슷한 이제하 시인에 대해선 자신은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데 비해서 이제하는 실물을 보고 그걸 기억해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이제하는 키리코, 뭉크, 프란시스 베이컨의 영향을 받았고 자신은 장 뒤뷔페,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이제하는 직장생활이 짧아 자유인에 가까운 것에 비해 자신은 30년 월급쟁이 한 것이 한이다. 김영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가로 독신..

감상글(책) 2024.01.28

나의 올드 오크

독립영화관 오오 극장에서 전번에 (아키 카우리스마키, 2023)에 밀려 못 봤던 를 봤다. 올드 오크는 영국 폐광촌 마을의 술집 이름이다. 대개 가난한 노동자들이 주거하는 지역이다. 나라에서 받아들인 난민들이 이곳에 많이 들어오면서 갈등상황이 연이어 불거진다. 올드 오크 마을에 이전부터 있었던 주민들은 난민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부류들이 많다. 동네가 지저분한 곳이 되고 있다는 생각, 집값이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들은 몹시 괴로운 심정이다. 또 일부긴 하지만 난민들의 상황을 걱정하고 이들의 적응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순한 술집 그 이상의 동네 아지트 역할을 해오던 올드 오크의 주인 남자는 이 공간을 더 크게 개방해서 난민들과 이를 돕는 주민들이 밥 한 끼 나누는 회합의 장소로 기꺼이 ..

감상글(영화) 2024.01.28

사랑은 낙엽을 타고

켄 로치 감독이 를 봐야겠다는 생각에 독립영화 상영관인 오오 극장(대구 만경관과 곽병원 사이에 위치)을 찾았다. 혹시나 영화 상영 중에 기침이 나올까 봐 기침약 먹고 기침약 비스무리한 것도 찾아서 입에 털어넣고 목캔디까지 챙겨서 갔다. 그런데 가서 본 영화는 대신 다. 좋아하는 걸 아끼고 싶어서 라고 해두자. 는 핀란드 출신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작품이다. 영국 출신 켄 로치 감독처럼 주류보다는 비주류 특히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많이 만들어온 것 같다. 영화 속 남자와 여자도 일용직 노동자로 고용이 불안한 상태고 실제 해고와 재취업을 반복한다. 그런 중에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남자는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 어렵게 금주를 결심한다. 서사나 감정이 과하지 않으면서 부족..

감상글(영화) 2024.01.28

마음이 저만치에서 / 양윤미

마음이 저만치에서 / 양윤미 한 달 생활비가 육만 원이라고 해서, 열 살짜리 인도 아이, 아닌에게 매달 육만 원을 보냈어요 십 년 정도는 돕고 싶었어요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돈으로 해결되는 일이라잖아요 십 년이면 720, 그깟 돈으로 누군가의 세상에 보탬이 되기로 했어요 정기적으로 감사 편지가 왔지요 미혼에 무자식인 주제에 아닌의 안위에 뿌듯했어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닌의 키가 자라고 몸이 자라고 저의 마음도 자랐습니다 상황이 달라지기 전까진 말이예요 아닌이 너무 쑥쑥 자라서 생활비에다 학비 삼십이 더 필요하대요 침이 꼴깍 넘어갔어요 아닌 건 아닌 거잖아요 비정규직 강사는 출산과 동시에 캐시가 멈추거든요 결국 저는 제 새끼들을 선택했어요 한동안 돌을 씹는 기분이었어요 아닌이 잘 살아남길 기도하는 수..

감상글(시) 2024.01.18

<소설> 빨강 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박혜원 역), 『빨강 머리 앤』, 더모든, 2019. - 작가 몽고메리(1874〜1942)는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외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녀의 『빨강 머리 앤』은 1907년 출간되었다. 소설 속 앤은 부모를 잃고 다른 집을 옮겨 다니다가 고아원에 보내지고, 섬에 사는 매슈와 마릴라 남매에게 입양되어 자란다. 작가 몽고메리가 섬에 돌아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외할머니 일을 도왔듯이 소설 속 앤도 자신의 은인인 매슈가 죽은 후 마릴라 곁에 남기로 결정한다. 몽고메리의 자전적 경험이 소설 속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을 것이다. 소싯적 읽었던 기억만 희미하게 갖고 있던 『빨강 머리 앤』을 다시 읽으니 그냥 처음 읽는 느낌이다. 다른 책과 번갈아 보..

감상글(책) 2024.01.15

전태일 아니 이소선 / 이철산

전태일 아니 이소선 / 이철산 전태일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누구길래 시민들이 돈을 모아 잠시 살았던 옛집을 사들이고 무슨 마음으로 노동자들이 손을 모아 허물어진 옛 집터를 되살리고 마침내 ‘전태일’ 문패를 달고 기억의 숲 희미한 길을 되밟아 여기까지 왔냐고 묻습니다 대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살았던 전태일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일당 50원을 벌기 위해 햇빛도 들지 않고 허리도 펼 수 없는 작업장에서 다락방에서 하루도 쉬는 날 없이 15시간을 일하는 평화시장 어린 시다들을 위해 스스로 근로기준법과 함께 불타올랐던 스물세 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 청년 전태일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한번은 들어봤다 할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전태일 아니라 이소선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스스로 노동법과 함께 불타..

감상글(시) 2024.01.10

<그림 산문집> 방방곡곡 사람냄새

김주대, 『방방곡곡 사람냄새』, 시와에세이, 2023. 향숙 김밥, 은주 칼국수. 언젠가 들렀던 가게 이름이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부부가 영업을 같이했을 것이고 가게 이름의 주인이 누구냐고 실없이 물었다가 안주인의 이름을 딴 것이란 얘길 들었다. 지나는 길에 한 번 들른 게 전부인 까닭에 가게의 영업 상황을 알 수 없지만 왠지 친밀감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는 인상을 갖고 있다. 훈기네상회는 김주대 시인이 방방곡곡을 다니다가 만난 슈퍼의 이름이다. 시인의 그림 산문집 『방방곡곡 사람냄새』는 훈기네상회 이야기로 시작된다. 슈퍼 주인인 아버지와 슈퍼 이름의 주인인 아들이 주고받는 말을 재미나게 소개한다. 사탕을 탐내는 아들과 소주를 축내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이야기 끝에 아들은 자랑스러운 아들은 못 돼도 착한 ..

감상글(책) 2024.01.09

산에서 2/ 한성기

산에서 2 / 한성기 밥만 먹으면 사람들은 논에나 밭에 가 있었다. 밥만 먹으면 사람들은 거기서 하늘이 길러 주는 곡식의 아랫도리를 조금씩 거들어 주고 있었다. 산에서 살면서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 시중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여기저기에 허리를 굽히고 학처럼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 산에서 살면서 내가 본 것은 바꾸어서 말하면 엄청나게 커다란 눈부신 공간인지도 모른다. 밥만 먹으면 사람들은 논에나 밭에 가 있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하늘이 길러 주는 곡식의 아랫도리를 조금씩 거들어 주고 있었다. -『산에서』 배영사, 1963 / 『한성기 시전집』 푸른사상사, 2003, 감상 –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한성기 시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역」(1952)의 ..

감상글(시) 2024.01.04

<소설> 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강명순 역), 『향수』, 열린책들, 1991. -주인공 그르누이는 파리의 이노셍 묘지 근처에서 태어난다. 사람은 누구나 특유의 냄새를 갖고 있지만 그르누이는 몸에 냄새가 없는 아이이고 이 점이 주위 사람들을 꺼림칙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너도밤나무 장작더미 위에서 나무 향을 자신의 피부 속으로 스미게 해서 스스로 나무가 된 듯한 체험을 하며 그르누이는 냄새를 통해 단어를 알아간다. 냄새로 인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선 사람과 사물을 놀라울 정도로 구별해내지만 냄새가 없는 추상적인 단어 사용엔 어려움을 겪으며 의사소통을 최소한으로 하는 소년으로 성장해간다. 보모의 손에서 가죽을 다루는 무두장이에게 넘겨졌던 그르누이는 파리의 마레 거리에서 너무나 소유하고픈 사람의 향을 맡게 된다. 그 사람..

감상글(책) 2023.12.29

<에세이> 맹자, 세상을 말하다

송철호, 『맹자, 세상을 말하다』, 학이사, 2023. - 맹자를 읽은 송철호 쌤의 글을 읽는다. 맹자가 강조했던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인과 의에 대한 언급이 많은 편이다. 공자도 맹자도 저자도 사람살이의 기본은 인이라고 여긴다. 저자는 『설문』의 인(仁)에 대한 풀이를 인용하여 두 사람이 나란히 있으며 서로 친하다는 의미로 인(仁)을 받아들인다. 두 이(二)를 위아래의 부모 자식 관계로 새겨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함으로 타인을 대하는 것이 어진 사람의 자세일 것이다. 하늘과 땅의 관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수직적 관계로 보는 건 친함과 거리가 멀다. 저자는 그 친하다는 것을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서로 ‘같다’ 또는 ‘같게 하다’는 뜻으로 새긴다. “남과 나를 같게 대하는 것, ..

감상글(책) 2023.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