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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반의 묵죽 / 김윤현

반반의 묵죽 / 김윤현 속을 비워 그럴까 어지러이 부는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 여백은 또 그걸 알고 흔적도 없이 세상으로 내보낸다 그려서 반, 그리지 않아서 반 오오, 반반의 극치여! 나는 아직도 대나무를 그리는 데만 급급하니 그 언제 반반한 묵죽도 한 점 제대로 그릴 수 있으려나 -『반대편으로 걷고 싶을 때가 있다』, 한티재, 2022. 감상- 근자에 ‘칼보다 푸른 기개’란 표제로 천석 박근술 회고전이 있었지만 아쉽게 놓쳤다. 먹만 가지곤 푸른색을 내지 못하겠지만 대나무의 속성과 그걸 담아냈을 묵죽도의 모습을 잘 반영한 제목이란 생각이 든다. 김윤현 시인이 보았을 “어지러이 부는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도 그런 기개를 표상하고 있다. 대나무가 꺾이지 않는 것은 속이 꽉 차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감상글(시) 2023.05.29

<소설>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김연수 역), 『대성당』, 문학동네, 2007. -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모음집. 레이먼드 카버는 1938년 미국 오리건 주에서 가난한 제재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른 결혼에 이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한동안 알콜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시절이 있었다. 마흔에 이르러서 금주에 성공했으나 아내와 헤어졌다. 곧이어 「대성당」(1983) 등으로 문명을 떨치기 시작했으나 1988년 암으로 작고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알콜 의존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소설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 단편 「칸막이 객실」의 마이어스는 이혼 후 혼자 사는 남자다. 8년 만에 아들의 편지를 받고, 아들이 있는 스트라스부르에 갈 생각을 한다. 아들에 대한 기억은 부부싸움 중인 마이어스에게 아들..

감상글(책) 2023.05.21

겉절이 / 권상진

겉절이 / 권상진 어느 현장에서 품을 팔았는지 낡은 봉고차가 식당 앞에 한 무더기 일당쟁이를 부려 놓는다 땅거미가 하루의 노동에서 건져낸 저들을 척척 국숫집 의자에 걸쳐 놓으면 시멘트 바닥으로 주르륵 흐르는 노을 하얀 거품을 저녁의 가장자리로 밀어내며 국수가 삶아지는 동안 그들은 종일 다져 온 양념으로 서로를 버무린다 잘근잘근, 오늘의 기분을 씹으며 겉절이 한 잎을 반으로 찢는다 너무 길거나 폭이 넓은 슬픔은 적당한 어디쯤에 젓가락을 쑤셔 넣고 주욱 찢어야 비로소 먹기에 알맞은 크기가 된다 반쯤 숨이 죽은 채 하루가 치대는 대로 몸을 맡겼다가 국수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 아직은 어디에라도 곁들여지고 싶은 절여진 겉들 ㅡ『노을 쪽에서 온 사람』, 걷는사람, 2023. 감상 – 봉고차에서 노을 쪽 식당으로 부..

감상글(시) 2023.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