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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화 향기 / 임미리

해당화 향기 / 임미리 그림자도 숨어버린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바람을 찾아 나선 선정암 입구에 들어서니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 진동하네. 두리번거리다 마주친 해당화 한 무더기 척박한 모래땅 바닷가에서만 꽃 피는 줄 알았는데 정인을 만난 듯 반갑게 마주앉네. 산사의 바람에 얼마나 흔들렸을까. 붉은 꽃잎이 더욱더 애잔해 보이는데 그리운 이를 기다리는 듯 강인하게 피었네. 산 넘고 바다 건너 먼 곳까지 아련한 향기 한 줌이라도 보내려했을까. 붉은 꽃잎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그늘이 보이네. 푸른 가시로 버텨낸 세월이 얼마였을까. 보는 이의 아련함 깊어 가는데 바람결에도 모른 척 잠이 드는 해당화 내일쯤이면 찾아올 그리운 이의 발치에서 더욱더 붉게 피어날 꽃잎 무더기 향기로운 몸짓이 산사를 흔들어 깨우네. -『물..

감상글(시) 2023.07.12

유령놀이 / 나문석

유령놀이 / 나문석 극락강을 건너온 눈바람이 온 누리 하얗게 칠하는데 창가에 선 백발의 어머니, 밤새도록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다린다 누워서 기다려도 오신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다 지나가는 기차소리에 놀란 눈으로 통근열차 놓치면 작업반장한테 혼난다고 안달하는 어머니 도시락 가방을 챙겨 들고 기어이 방문을 나서려고 한다. 동이 트려는지 창밖이 밝아지기 시작하는데 태어나기도 전의 날들이 굵은 눈발이 되어 허공을 가득 채우고 울 엄니 내일 아침에 시집간다고 새색시 화장을 시작한다 * 영산강과 황룡강의 분기점에서부터 광주천이 나누어지는 지점까지를 극락강이라 부른다. -『정삼각형 가족』, 시와에세이, 2014. 감상 – 시인의 아버지 나경일 선생은 제일모직 노조 설립과 운영에 애쓰다가 고초를 겪었던 노동자이자 노동 ..

감상글(시) 2023.07.06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2022. -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실제 빨치산 출신이다. 1990년 출간되었다가 판매 금치 처분을 당하기도 했던, 작가의 『빨치산의 딸』(1990)을 읽으면 두 분의 생각과 삶이 어떠했는지 혁명이 좌절된 반공사회에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나 순서를 달리해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먼저 읽게 된다. 작가 나이 스물다섯에 쓴 『빨치산의 딸』은 부모의 증언이 토대가 되었던 소설이지만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그로부터 30여년이 더 지나서 작가의 시선이 전보다 많이 투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전작을 읽지 않으니 표현이 애매해진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3일간의 장례식장 풍경이 이 소설의 중심축이며 여기에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이 평..

감상글(책) 2023.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