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716

봄은 전보도 안 치고 / 김기림

봄은 전보도 안 치고 / 김기림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말 없는 산허리를 기어오는 차 소리 우루루루 오늘도 철교는 운다. 무엇을 우누. 글쎄 봄은 언제 온다는 전보도 없이 저 차를 타고 도적과 같이 왔구려 어머니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골짝에서 코 고는 시냇물들을 불러일으키면서……. 해는 지금 붉은 얼굴을 벙글거리며 사라지는 엷은 눈 위에 이별의 키스를 뿌리노라고 바쁘게 돌아다니오. 포플러들은 파-란 연기를 뿜으면서 빨래와 같은 하-얀 오후의 방천에 늘어서서 실업쟁이처럼 담배를 피우오. 봄아 너는 언제 강가에서라도 만나서 나에게 이렇다는 약속을 한 일도 없건만 어쩐지 무엇을-굉장히 훌륭한 무엇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아서 나는 오늘도 괭이를 멘 채 돌아서서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

감상글(시) 2022.04.02

야구의 영혼 / 장수철

야구의 영혼 / 장수철 외야석에 앉으면 야구의 영혼이 느껴졌다 그해의 모든 시즌이 끝난 홈구장의 외야석에 앉아 나는 시즌 첫 홈런을 맞은 투수의 와인드업을 흉내 내며 음울한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텅 빈 덕아웃에서는 야구의 영혼이 담배껌을 씹는 소리가 쓸쓸히 들려왔다 달리던 말에서 내려 뒤늦은 영혼의 당도를 기다리는 체로키 인디언처럼 야구의 영혼은 불 꺼진 스코어보드 위에 걸터앉아 잊고 있던 그해 마지막 시즌의 전력투구를 회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외야수의 글러브가 놓친 파울볼처럼 불구의 시간들이 펜스 밑에 처박히며 쌓여갔다 그새 나는 한 차례 짧고 단단한 바람을 맞는다 그게 야구의 영혼인 줄도 모르고. 야구연감에 기록된 역대 가장 절망적인 대진표를 열광의 시즌이 끝난 그해 텅 빈 청춘의 기억 위에 옮겨 ..

감상글(시) 2022.03.12

드들강 / 김황흠

드들강 / 김황흠 강에 머물러 바라보는 날이 많다 딴 때 같으면 고추 마무리로 고양이 손도 아쉬울 판 하우스가 물에 잠겨 일이 사라지고 나락을 베고 난 뒤 완전 백수 늘 그렇게 흐르고 흐를 뿐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해 싱거운 너나 보자고 매번 오지만 그래도 시들어 버린 풀에 눈 마주치고 마른 억새 숱에 지은 벌레집도 눈 맞춘다 그런 날이 길어지지만 엎치락뒤치락 뭉텅뭉텅 흘러가는 물살 소리가 봄물로 물든다고 속삭여 주려는지 아까부터 쇠백로가 목을 길게 추켜세우고 슬금슬금 쳐다본다 『책장 사이에 귀뚜라미가 산다』, 문학들, 2021. 감상 – 햇살 한 잎 입에 물고 청둥오리 떼는 살 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물위를 떠다닌다 오래도록 새 울음에 젖은 물살이 마른 강판 같은 겨울을 건넌다 「겨울 강」 전문 「..

감상글(시) 2022.03.01

옥이네 집 / 전상렬

옥이네 집 / 전상렬 한량없이 기쁜 날도 있다. 한량없이 슬픈 날도 있다. 그냥 멍한 날에도 옥이집은 붐빈다. 옥이집은 외상이 통한다. 옥이 엄마는 외상값 때문에 산다. 정다운 얼굴끼리 반갑고 독설과 짭짤한 유우머를 차려놓고 어지러운 세대의 욕지거리 속에 현실을 묻어버린다. 태고에서 물려받은 고함 소리와 한바탕 주정꾼의 표정이 저마다 갈 길을 가고나면 향방(向方)과 옥이 엄마 사이를 고독이 발을 멈추고 대구백화점(大邱百貨店) 문을 닫는다. -『생선가게』. 상지사, 1977. 감상 : 6,70년대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옥이집은 시내 중앙로 아카데미 극장 맞은편 골목으로 종로까지 못 가서 그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호텔이 들어서 있는 듯하다. 옥이집 단골로, 술로 남에게 질 생각이 ..

감상글(시) 2022.02.26

몽유끽연도(夢遊喫煙圖) / 차영호

몽유끽연도(夢遊喫煙圖) / 차영호 끊은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오늘은 낮잠 속에서 새 세상 만난 듯 담배 피우는 나를 만났다 우주를 송두리째 한 모금에 빨아들여 맛나게 소용돌이치는 블랙홀 말머리성운이 갈기를 흩날리며 히히힝 아득한 성간(星間)을 내닫고 있었다 그 바람에 기침하셨는지 어제 뵌 열암곡 새갓골* 마애불님께서 지금이 어느 때냐고 물으셨다 내가 입 안 가득 머금은 미련 땜에 어물어물 일어나실 인연이라고 여쭙기도 전에 온 우주를 코딱지만 하게 뭉쳐 코앞에 두고는 엎더진 채 코를 다시 고신다 한숨 더 자고 일어날 테니 니 놈은 어여 담배 끊을 궁리나 하라는 듯…… 입때까지 천 년을 주무셔도 콧구멍조차 필요 없는 분이니 입술을 옴쭉 하실 리 만무하건만 나는 셔터를 누르기 시작하였다 배터리가 거덜 날 때까..

감상글(시) 2022.02.17

노을빛 금목서 나무 아래에서 / 노태맹

노을빛 금목서 나무 아래에서 레퀴엠 3-9 / 노태맹 황금빛 바람 불고 붉은 풀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눕는 가을 들판을 오늘은 너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기야 이제는 너의 풍경이 나에게만 남아 있어 이 눈물이 무슨 소용인가도 싶지만 가을 다하도록 날아다니는 잠자리 한 마리처럼 이 가을 나의 슬픔은 악착같다. 이런 날 너와 소주잔 부딪치며 길가 어느 식당에서 삼겹살 구워 먹고 싶은데 그저, 내가 네 앞에 앉아 있기만 해도 좋을 텐데, 어슬렁거리는 걸음 같은 어둠은 오고 골목길 주황빛 늦은 꽃을 피워 올린 금목서 나무 아래 저녁노을은 그림자처럼 깔려 이 가을 나의 슬픔은 온통 붉은 빛이다. 오늘은 너 없는 나를 위해 술노래를 부르리니 그곳에서 잘 있어라. 그래, 다시 돌아간 그곳에서 잘 있거라. 그래, 나는 ..

감상글(시) 2022.02.13

등나무의 지붕 / 정재원

등나무의 지붕 / 정재원 등나무 그늘에 앉았다 듬성한 틈으로 얼레빗 빛이 스민다 여름을 보내고 물구나무서서 내려다보는 꼬투리 칭칭 몸 꼬아 타고 오르는 힘 저 꼬투리 속에는 수많은 하늘이 들어 있다 그해 봄, 마을 어귀 회관 앞 등나무는 보랏빛 꽃물로 그늘을 엮고 있었다 등나무 꽃 사이 종종 걸음으로 친정집 현관문 열었는데 부엌에서 나오는 구부정한 등허리 그늘 꽃을 다 피우고 뜯긴 등나무 껍질이었다 철렁, 가슴 한 줌 아버지의 발 앞에 쏟고 돌아갈 마을버스를 기다리는데 2층 난간 짚으며 뒤따라온 향내가 코끝을 찔러 두 눈 뜰 수가 없었다 버스를 그냥 보냈다 등나무 아래 등꽃은 뚝뚝 지는데 서쪽하늘은 어룽진 동그라미로 하루 꽉 채우고 있었다 -『저녁의 책과 집을 잃은 노래』, 문예바다, 2021. 감상 :..

감상글(시) 2022.02.07

옛이야기 구절 / 정지용

옛이야기 구절 / 정지용 집 떠나가 배운 노래를 집 찾아오는 밤 논둑길에서 불렀노라. 나가서도 고달프고 돌아와서도 고달팠노라. 열네 살부터 나가서 고달팠노라. 나가서 얻어온 이야기를 닭이 울도록, 아버지께 이르노니  ̄ 기름불은 깜박이며 듣고, 어머니는 눈에 눈물을 고이신대로 듣고 이치대던 어린 누이 안긴 대로 잠들며 듣고 윗방 문설주에는 그 사람이 서서 듣고, 큰 독 안에 실린 슬픈 물같이 속살대는 이 시골 밤은 찾아온 동네사람들처럼 돌아서서 듣고.  ̄ 그러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있던 시원찮은 사람들이 끝내지 못하고 그대로 간 이야기이니 이 집 문고리나, 지붕이나, 늙으신 아버지의 착하디착한 수염이나, 활처럼 휘어다 부친 밤하늘이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전하는 이야기 구절일러라. -《신..

감상글(시) 2022.01.30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 피재현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 피재현 아버지는 가을이 깊어지면 감 따러 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나는 감 따는 게 싫어 짜증을 냈다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아느냐고 감 따위 따서 뭐 하냐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다시 가을이 왔을 때 엄마는 내게 말했다 니 애비도 없는데 저 감은 따서 뭐 하냐 나는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톱을 내려놓고 오래도록 울었다 -『원더우먼 윤채선』, 걷는사람, 2020. 감상 – 고흐의 (1889)! 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별빛이 소용돌이치는 그림과 이 시는 별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시 제목에서 왠지 시인이 고흐를 생각했을 것도 같다. 바깥으로 다닐 때가 많았던 고흐가 서른이 되어서야 아버지 교회가 있던 누에넨으로 돌아온다. 아버지한테 인정받지 못하는 설움을 고백하며 밀레 같은 ..

감상글(시) 2022.01.21

생불(生佛) / 우정연

생불(生佛) / 우정연 재만 아재는 정선 아재와 항상 어디든 함께 다닌다 그들은 마르고 키가 작아서 둘의 몸무게, 합이 일인분 똥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바닥까지 도착하는 데 한 삼백 년 걸린다는 해우소와 절 구석구석 당연한 듯 궂은일 하면서 둘의 공양, 합이 일인분 병이 난 재만 아재 진득하니 입원도 못하고 낡아빠진 허리와 바람 드는 정강이 안중에 없이 절집 살림 할 일도 태산, 둘의 걱정, 합이 일인분 구구 절절한 사연, 큰 법당 부처님은 다 알고 계실 터이지만 아재가 아프거나 말거나 입 무겁고 태평한 부처님 미소, 합이 항하사 절집은 절로절로 저절로 잘 돌아가고 관광객이 봄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도 아재들이 없으면 텅 빈 절간이다. 『자작나무 애인』, 문학아카데미, 2020. 감상 – 선암사 뒷간(해우소..

감상글(시) 2022.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