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716

1984년, 빵가게 / 여국현

1984년, 빵가게 / 여국현 ‘1984년부터 주인이 직접 만든 빵가게’가 문을 닫았다 자정이 가까울 무렵 물에 젖은 깻잎 모양 흐느적거리며 귀가할 때 은행 옆 은행나무 맞은편 옛체로 쓰인 하얀 간판 아래 밝은 조명이 환한 진열장 뒤에서 가게를 지키던 중년의 부부가 빵가게 옆을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금전출납기 통을 열었다 닫거나 가게 벽면에 달린 태양 장식 시계를 보거나 진열장 속 팔리지 않은 가지런한 빵들을 바라보고 있던. 부산어묵 아주머니는 ‘오래 버텼지’ 했다 슈퍼마켓의 사내도 ‘오래 버텼지’ 했다 대형 체인 바케트가 대로변을 점령한 뒤로 몇 개의 작은 빵집이 들어섰다 사라지고 하던 곳 어느 일요일 늦은 오후 주인 남자가 빵 봉지를 내밀며 멋쩍게 말했다 “오늘 두 번째 손님이세요” 제..

감상글(시) 2022.01.01

가시리오 / 박구미

가시리오 / 박구미 가시리오. 대문 활짝 열고 들어가셔서 이 방 저 방 둘러보시고 앞마당에 장독대랑 기염나무도 쓰다듬어 보시고 뒷마당에 모란이랑 앵두나무에 싹이 튼 것도 보시고 버스 지나가는 신작로도 쳐다보시고 오랜만에 마을 회관에 가셔서 동네 어르신들과 인사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동산 모퉁이 가는 길 느티나무 아래 앉아서 동네 어귀도 바라보고 저 멀리 백운산이며 상연대도 바라보시고 힘겹게 오르고 걷고 하셨던 세재 뜰이며 기염나무골 들녘이며 산도 둘러보시고 그렇게 그렇게 다 둘러보시고 평생토록 농사일이며, 자식들 걱정이며 자식들 줄 김장이며, 고추장이며, 청국장이며 이런 걱정들 하지 마시고 이제는 허리도 꼿꼿하게 펴시고 두 다리 아프지 마시고 예쁜 옷 입고 예쁜 신발 신고 잘 생긴 아버지한테 시..

감상글(시) 2021.12.25

취야 / 정훈

취야(醉夜) / 정훈 심장을 터트려 내 몸뚱아리를 동댕이치고 싶은 석양 사람보다는 술이 좋더라 몸이 불타 이글거리면 내 위에 잘난 놈이 없어 좋더라 비분(悲憤)보다 차라리 술에는 위엄이 있어 쥐새끼 놈들을 호령 호령 해본다 배반한 사람들로 한 푸념도 아니고 타고난 내 불운에 항거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호망(浩茫)한 허공을 향하여 포효하는 것이다 내가 술인지 술이 나인지 거인이 된 것처럼 자랑스럽구나 왜 이리 하늘은 숨 막히도록 나지막한 것이냐 지구는 종선으로 흔들려서 호숩다 -『피 맺힌 연륜』, 박영사, 1958 감상 : 정훈 시인은 1911년 논산 출신으로 휘문고보에서 정지용의 가르침을 받았다. 논산은 1925년생 박용래와 1934년생 김관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정훈 시인은 대전 대흥동에, 박용래..

감상글(시) 2021.12.11

만복사미륵불친견기 / 복효근

만복사미륵불친견기 / 복효근 내가 사는 남원의 만복사지에는 보물이 여럿 있는데요 그 가운데 불상이 놓여있었다는 석좌가 하나 있지요 석불이었는지 금불이었는지 목불이었는지 언제 어느 날 있었는지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는데요 보물이라니오 있었는지도 모르고 불상은 있지도 않은데 희한한 보물도 있지 그저 육각형의 돌덩어리일 뿐인데 엄마 손 잡고 산책 나온 듯싶은 아이 하나가 기를 쓰고 올라가 앉으니 하, 거기 문득 생불이 생불이 한 분 계시는 것이었어요 왜 저 돌이 보물인지 번뜩 깨달았지요 깔깔 웃으며 장난스럽게 표정을 짓고 손으로 브이 자를 그려 보이는 저 아이가 56억 7천만 년에 오신다는 미륵부처님이신가 아니라 해도 오신다면 저 모습이겠구나 생각하는데 안 된다며 어서 내려오라고 위험하다고 성화를 부리는 엄마..

감상글(시) 2021.12.05

밥 무덤 / 허정

밥 무덤 / 허정 단칸방 아랫목에 우묵한 무덤이 있었습니다 비단 보자기를 한 겹 벗기면 백양목 기저귀 같은 강보를 다시 한 겹 벗겨내면 그 속에 사기 밥그릇 한 개가 작은 꿀단지처럼 떡하니 있었습니다 우리 집 장남인 큰 형이 택시를 몰다 밥 먹으러 올 때면 엄마는 조심스레 비단 보자기와 강보를 풀었습니다 밥뚜껑을 열면 송글송글 더운 땀이 맺힌 밥알들이 고개를 쏙 내밀었습니다 밥그릇이 있던 아랫목 장판은 까맣게 탄 누룽지 같은 지도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칠순이 넘은 큰형은 골프장 야간 경비를 나가고 있습니다 큰형의 푸른 잔디밭에 어머니의 발자국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단지 순찰 코스에는 오목한 밥 무덤이 잔디 풀에 숨겨져 있습니다 엄마의 따스한 밥공기가 빠져나간 밥 무덤에 골프공 같은 흰 달빛만 밥숟가락처럼 들..

감상글(시) 2021.11.26

서울과 칸나 / 임창아

서울과 칸나 / 임창아 셋방 한 칸이 신접살림 전부였을 때, 아버진 서울이 처음이었다 딸 살림 보러온 아버지는 쌀도 아니고 고등어 아닌 구근 몇 개 들고 와서는 마당 한구석에 심었다 땅속에서 저를 밀어 올렸다가 쓸어내리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몸살로 조퇴하고 직장에서 돌아온 어느 날, 키만큼 큰 꽃나무 아래서 속 다 비우고 고개 드는데 빨간 꽃이 꽃대를 올리고 있었다 아찔한 붉은 빛으로 헤프다 싶은 브로치 가슴에 달고 아무도 만나자는 사람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갈 데도 오라는 데도 없이 내 속병은 꽃대만 열심히 밀어 올렸다 불안한 꽃대 위로 잠자리 몇 바퀴 돌다 갔고, 구름이 그 위를 비켜 지나갈 때 언뜻 아버지 얼굴이 스쳤다 『즐거운 거짓말』, 문학세계사, 2017. 감상 – 칸나는 여러해살이..

감상글(시) 2021.10.14

먹고 사는 일 / 김창제

먹고 사는 일 / 김창제 머리 위에서 청설모가 뭔가를 떨어뜨린다, 솔방울 갉아먹고 껍데기를 떨어뜨린다 나는 쇠를 잘라 먹고 사는 사람, 먹어도 먹어도 쨍그랑거리는 사람으로 돌아서자 솔방울 하나 툭, 떨어진다 『지는 꽃에게 말 걸지 마라』, 2021. 감상- 1946년 이윤수 시인은 시 동인지《죽순》 창간호를 낸다. 중간에 삼십 년의 공백기가 있었지만 《죽순》은 지금도 간행되고 있고, 김창제 시인은 그 잡지 발행을 주관하는 죽순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시인의 고향은 거창이다. 거창은 임화의 아내인 소설가 지하련의 고향이고, 신달자 시인과 이기철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김창제 시인의 이번 시집을 출간한 학이사 신중현 대표와 시집 해설을 쓴 신용목 시인도 거창 출신이어서 우연인 거 같기도 하고 필연인 거 ..

감상글(시) 2021.10.11

장날 / 황경민

장날 / 황경민 고령 시외버스터미널 차타로 나가는 곳 차타로 나가는 사람만 있으니 차타로 나가는 곳 모욕하러, 장보로, 볼일보로 나온 할매들 차타로 나가는 곳으로 나와 뜸하게 오는 차를 기다린다 담배도 풉고, 오뎅도 묵으며... 바라! 영숙네 아이가? 누고? 아이고 봉수이행님, 모욕하로 왔는교? 언지러 모욕 벌시로 했다. 인자 집에 갈라꼬. 내는 인자 나오요. 오이라. 요 안자가 오뎅 하나 무라. 아이요, 아지매? 요 오뎅 오백은어치만 주이소. 아이다. 내는 두 개나 무따. 니나 무라. 와? 한 개 더 무이소. 모욕한다꼬 심 다 빼실낀데. 그래, 니 요새 아프다카더만 개않나? 머 맨날 고만고만 합니더... 행님? 와? 아있고? 합천행님. 올 가실에 죽어삣다요. 누? 김천댁? 말고. 저 재 너모에 살던 합..

감상글(시) 2021.09.30

자화상 / 박세영

자화상 / 박세영 지나간 내 삶이란 종이쪽 한 장이면 다 쓰겠거늘 몇 점의 원고를 쓰려는 내 마음 오늘은 내일, 내일은 모래, 빚진 자와 같이 나는 때의 파산자다, 나는 다만 때를 좀먹는 자다. 언제나 찡그린 내 얼굴은 펼 날이 없는가? 낡은 백랍같이 야윈 내 얼굴, 나는 내 소유를 모조리 나누어 주었다. 오랫동안 쓰라린 현실은 내 눈을 달팽이 눈같이 만들었고 자유스런 사나이 소리와 모든 환희는 나에게서 빼앗아 갔다. 오 나는 돈키호테요 불구자다. 허나 세상에 지은 죄는 없는 것 같으되 손톱만 한 재주와 날카로운 인식에 나는 가면서도 갈 곳을 잊은 건망증을 그릇 천재로 알았고, 북두칠성이 얼굴에 박히어 영웅이 될 줄 믿었던 것이 지금은 죄가 되었네. 그러나 칠성 중에 미자르(개양성)가 코 옆에 숨었음은,..

감상글(시) 2021.09.26

그림자 왕릉에 서다 / 한영채

그림자 왕릉에 서다 -진평왕릉 / 한영채 왕릉 입구 젊은 혈기들 오후 네 시 라틴음악이 곡선을 울린다 왕조의 그림자 따라온 여기 남동으로 길어진 숨은 그림자는 햇살 아래 미끄러지고 흔들리는 물버들 이파리 비비는 소리 바람결에 낭산을 돌고 있다 어느 곳에서 덕만을 부르는 진평의 낮은 목소리가 왕릉 위에 나무 그림자로 선다 어스름 배웅 길 선도산 아래 오랜 곡선들 무리 지은 갈대 쓸쓸한 손짓이다 팔짱 낀 그가 고개 숙여 걷는다 그림자는 천천히 해넘이를 본다 『모나크 나비처럼』, 한국문연, 2021. 감상 – 경주 지도를 볼 것 같으면, 반월성을 중심으로 서편에 선도산(서악)이 있고, 동편에 낭산이 있다. 그 아래 남쪽으론 남산이 평지를 품듯이 있다. 서악 고분군엔 진흥왕릉, 진지왕릉, 무열왕릉이 있고, 낭산..

감상글(시) 2021.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