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716

달리 씨네 쌀 배달하기 / 변홍철

달리 씨네 쌀 배달하기 / 변홍철 나는 자동차도 없고 자전거도 없는데 주인이 쌀 배달을 나가라고 한다. 어깨에 쌀 한 가마니를 얹고 달렸다. 십 리가 넘는 길이라고 했다. 알 듯한 얼굴의 세 인물이 동행이랍시고 따라나섰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자기들끼리 찧고 까분다. 누렇게 벼가 익은 들판이다 저기에는 복사꽃이 환하게 핀 풍경은 아름다운 그림 속. 소나기도 내리고, 나는 흠뻑 젖었는데 이상하게 별로 힘은 들지 않는다. 아니 힘은 펄펄 남아돌아 한참을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배달 가는 집을 못 찾겠어서 짜증이 난다. 휴대폰도 없는 나는 뒤에서 찧고 까부는 이들에게서 전화기를 빌려 쌀 배달시킨 집 주인이랑 통화, 어, 아는 목소리다. 푸른 기와집에 산다고 했던가. 친절하긴 한데 설명이 ..

감상글(시) 2022.06.15

청파동 / 박목월

청파동(靑坡洞) / 박목월 밤 늦은 청파동 마지막 합승을 타고 가면 숙대입구 가까운 어느 막다른 골목은 비어 있었다. 그 골목은 강소천의 가랑잎처럼 바튼 음성이 깔렸는데 소천은 어디로 갔느냐.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자정 가까운 밤 마지막 합승을 타고 가면 빈 골목은 두렵다. 발목이 잠긴 가로등이 있어 빈 골목은 더욱 두렵다. -『경상도의 가랑잎』, 1968 (『박목월 시전집』, 민음사, 2003) 감상 : 강소천(1915∼1963)은 함경도 고원 출신이다. 1941년,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 하늘 한 번 쳐다보고 /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 구름 한 번 쳐다보고”(‘「닭」’ 전문)가 실린 동시집 『호박꽃 초롱』을 출간한다. 함흥 영생고보 선생이었던 백석이 세 살 아래인 늦깎이 제자 강소천의..

감상글(시) 2022.06.10

개가 이끄는 평상의 낙서 / 문동만

개가 이끄는 평상의 낙서 / 문동만 나보다 오래 산 참나무에서 상수리 떨어져 조용히 굴러간다 흰둥이는 상수리 냄새를 맡았다가 먹을 수 없는 것들을 체념하고 나도 가리는 것이 있어 꺾어지지 않고 식량에 체하지 않고 요행이 여기까지 굴러왔구나 이런 생각이나 굴린다 우리는 평상에 엎드려 찐 밤을 까먹는다 나보다 밤을 더 좋아하는 강아지가 더 사람 같구나 생각이 들고 까먹으며 까먹는다는 말이 온 곳이 어디 사전 속인가, 어떤 주머니던가 자궁 속이나, 어디 점방이던가 하며 말에 말을 물고 흩어지고 모이는 구름들을 허밍으로 당긴다 평상에 누워 평(平)이라는 말, 평평 평등 평화 평정 평온 평원 오, 아들은 평발이로군 넓게 퍼져야 할 아깝고도 애틋한 말들을 오는 것 같았다가 돌아가는 말들을 까먹는다 -『설운 일 덜 ..

감상글(시) 2022.05.26

단오살구 / 김성중

단오살구 / 김성중 살구의 파아란 볼이 노랗게 주황으로 물들면 살구나무는 살구를 떨어뜨린다 담세정 살구는 씨알이 적지만 매우 달콤하고 무정식당 살구는 텅 빈 가스탱크 무서워서 힘이 없어 보이고 무정식당 주차장 모퉁이 살구는 국도 29호선을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에 시달리며 누르스름하게 익어서는 똑똑 떨어지고 관방제림 주차장 살구는 얼굴빛이 불그죽죽한데 마을 사람들이 장대로 후려 금방 사라졌고 계석대 살구는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겨우 보이고 황금소나무 식당 마당 살구는 풋살구를 떨구며 익어가고 백진각 옆 동정자마을 살구는 씨씨티비가 감시한다며 무서워하고 본때식당 살구는 내가 찾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며 익어가고 감나무집 살구는 노랗게 익어가는데 울타리가 쳐져 만날 수가 없고 만덕산 옥천골 법주사 입구 고목..

감상글(시) 2022.05.17

배드민턴 / 천지경

배드민턴 / 천지경 밤늦은 시각 대폿집을 파장한 아줌마 셋 시든 배추 같은 몸을 일으켜 배드민턴을 친다 노동에 찌든 몸은 운동으로 풀어야 하지 몸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체력을 길러야 혀 다부진 몸매의 전주 댁이 내리 꽂히는 콕을 쳐 올린다 물살로 출렁거리는 밀양 댁은 한 번 쳐 올릴 때마다 방귀의 힘을 빌린다 가장 높이 떴을 때 몸을 낮추는 셔틀콕 엉덩이부터 내려야 날개를 다치지 않는다는 진리를 일찍부터 깨달은 영은 엄마는 베트남서 아버지 같은 남자한테 시집 온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리는 아직 젊은 돌배기 엄마 힘이 너무 들어가면 어깨 너머로 달아나버리고 팔이 약하면 맥없이 툭 떨어지는 하루하루 술만 들어가면 괴팍함을 부리는 손님처럼 치는 대로 순응하다 어느 순간 까탈을 부리는 셔틀콕 이 바닥서 돈 벌..

감상글(시) 2022.05.08

쓰러져가는 미술관 / 이상화

쓰러져가는 미술관 어려서 돌아간 「인순」의 신령에게 / 이상화 옛 생각 많은 봄철이 불타오를 때 사납게 미친 모-든 욕망-회한을 가슴에 안고 나는 널 속을 꿈꾸는 이불에 묻혔어라. 쪼각쪼각 흩어진 내 생각은 민첩하게도 오는 날 묵은 해 뫼 너머 구름 위를 더우잡으며 말 못할 미궁(迷宮)에 헤맬 때 나는 보았노라. 진흙 칠한 하늘이 나직하게 덮여 야릇한 그늘 끼인 냄새가 떠도는 검은 놀 안에 오 나의 미술관! 네가 게서 섰음을 내가 보았노라. 내 가슴의 도장에 숨어사는 어린 신령아! 세상이 둥근지 모난지 모르던 그날 그날 내가 네 앞에서 부르던 노래를 아직도 못 잊노라. 클레오파트라의 코와 모나리-자의 손을 가진 어린 요정아! 내 혼을 가져간 요정아! 가차운 먼 길을 밟고 가는 너야 나를 데리고 가라. 오..

감상글(시) 2022.05.05

하얀 예수 / 유성운

하얀 예수 / 유성운 보따리 서너 개 메고 오 남매 주렁 달고 마가리 화전민으로 쫓겨 온 일도 억울한데 마흔 나이에 덜컥 또, 뭘 먹여 키우라고 어매는 너덜겅 밭에 상소리 꽤나 뱉었다지요 호밋자루 뗑강 분지르고 돌밭을 구르며 아기씨 떼어 낸다고 시악을 부리기도 하고 빨랫방망이 내던지며 양잿물 퍼마시고 같이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한 날은 손이 곱고 눈물도 꽁꽁 언 겨울이었다지요 엄마는 내가 배 속에서 9개월이 될 때까지 산 넘고 넘어 예배당을 다녔는데요 죄송스럽게도 그 은혜로 세상에 태어났죠 기어 다닐 때부터 온종일 혼자 놀았어요 나는 방치되고 다들 마음은 콩밭에 있었죠 울다 지쳐 냇가까지 굴러가서 물을 마시며 울수록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닫게 되었죠 울음을 포기한 세월만큼 강인해졌지만요 어지러운 시대..

감상글(시) 2022.04.30

정릉 / 박병대

정릉 / 박병대 정릉 마당은 햇빛 없는 밝음이었다 날아온 까치 촐싹대며 꽁지깃을 까딱거리고 태풍 지나간 잠든 바람에 단잠 자는 나뭇잎 왕사(王沙)의 신음이 발밑에서 뿌드득거린다 서넛의 여인네 웃음소리 봉분으로 날아가니 외로운 신덕왕후 번쩍 눈뜨는 소리가 났다 돌아앉아 교교히 흘러 낙차하는 도랑물 바라보니 가는 길 묻지도 않고 하는 이야기 귀 기울이니 낮은 사랑을 하라고 한다 낮은 생명 보듬고 맑은 숨 쉬라고 한다 슬퍼지면 저처럼 노래하라고 한다 평생의 부끄러움이 도랑물처럼 밀려왔다 도랑 건너편 석벽에 눈 맞추니 돌 위에 앉은 돌이 윗돌 받침 되어 받침이 받침으로 결속된 돌들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한 몸에 지닌 아름다운 믿음과 신뢰의 인드라망이었다 발아래 개미는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푸른 별의 역사는..

감상글(시) 2022.04.21

고래의 생활난

고래의 생활난 / 신휘 한 봉에 칠백 원짜리 안성탕면을 생으로 입에 넣고 씹다 보면 삶이, 그것이 마젤란 해협의 그것처럼 길고 멀게 느껴지지 허나 허기진 배에 물이라도 한 사발 들이켜고 나면 희망이, 그것이 아프리카 최남단의 흰수염고래처럼 금세 부풀어 오른다 꼬로륵 꼬로륵 며칠 동안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배앓이 하다 보면 마침내 눈에 뵈던 헛것이 걷히고 세상 물빛이 달리 보이는 건, 내 안에 거대한 고래가 살고 있기 때문 그런 날이면 꼭 사달이 났다 보일 듯 말 듯, 그럼에도 하늘과 바다를 경계로 교묘히 헤엄쳐 온 고래의 생활난은 웬만해선 파도 앞에 자신의 배를 뒤집어 물 밑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 이따금 수면 위로 핍진한 가계의 밥 짓는 연기만 피워 올릴 뿐 다시 먼 바다로 나아간 고래는 한동안 ..

감상글(시) 2022.04.13

장끼를 쏘다 / 정형무

장끼를 쏘다 / 정형무 어느 봄날 홀로 활 쏘다 장끼 한 마리 날아들어 문득 그를 겨냥하였다 오방색 아리따움을 향한 화살은 무겁* 언저리에 꽂히고 말았는데 죽음을 면한 꽁지깃들이 산당화 그늘 아래 헌사로웠다 두 번째 살을 먹이다 말고 나는 외면하고 그는 두리번거려 불안이 서로를 관통하였는데 빗나가는 게 때로는 잘 된 일 자칫 피를 보았을 것이다 가만히 활을 접으며 한숨 쉬기를 쏜 살의 달음질도 내빼던 날갯짓도 시속 십만칠천 킬로미터로 움직이는 지구 구물거리는 생명들 위로 쏟아지는 별똥별처럼 가없는 엔트로피*만 더해가는 헛된 몸짓일 테니 * 무겁: 활터 과녁 뒤 흙으로 둘러싸인 곳 -『닭의장풀은 남보라 물봉선은 붉은보라』, 우리시움, 2021. 감상 – 엔트로피가 트로피 종류인가 싶기도 할 텐데, 시인이 ..

감상글(시) 2022.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