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550

<에세이> 공무원 라나 언니

임경란, 『공무원 라나 언니』, 한티재, 2021. - 공무원인 저자가 공무원으로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좀처럼 변하지 않거나 조금씩 변해가는 공무원 내부 사정 및 주변 분위기를 소개한다. 소통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면, 부서 간 갈등 조정이나 협조를 위해 소통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갖고 시도행정포털에 ‘소통’이란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었지만 아무도 글을 남기지 않아서 슬며시 없어졌다고 한다. 게시판 하나 생겼다가 없어진 다소 싱거운 이야기이지만 문화와 제도와 직장 분위기로 뒷받침되지 않은 ‘소통’의 끝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저자는 소통 부재의 원인을 생각한다. 개인의 사적 욕망이 공공심을 압도하는 고시 제도의 문제에 공감하며 고위직과 하위직을 연결하는 중간 간부의 역할에도 주목한다. “성과와 충성을 기..

감상글(책) 2022.05.15

<에세이> 나는 괜찮습니다 당신도 괜찮습니다

임미리, 『나는 괜찮습니다 당신도 괜찮습니다』, 문학관, 2020. - 화순 하면 천불천탑의 운주사가 우선 떠오르지만 그곳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지역과 자신과 주변 이야기를 수필로도 쓰고 시로도 쓰는 임미리 작가가 또 생각난다. “토끼가 입을 맞춘다는 산골짜기에서 태어났다”는 임미리 작가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궁이에 직접 불을 지핀다. 농사일에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밥을 하고 반찬 장만도 거든 것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라디오도 없는 곳에서 자연히 노래란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초등 2학년 때 애국가를 가창하라는 숙제를 가사만 외워 자기 식으로 낭송하다가 망신을 당한 후 작가는 남 앞에서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제대로 듣는 훈련이 안 되니 들은 것을 소리로 낼 수 없..

감상글(책) 2022.04.03

<에세이> 먼 길,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

박수자, 『먼 길,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 창조와지식, 2021. - 『나는 B급 작가다』란 시집을 내기도 했던 작가의 산문집. 표제가 된 시를 검색해보니 시를 쓰면 쓸수록 돈이 든다면 B급이란다. 문학 주변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읽힌다. 또 어떻게 보면, 유력 잡지에 청탁 받는 시인은 제한적이고, 원고료까지 받는 시인은 더 드문 걸 보면 세상은 이미 B급이 주류가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칭이든 타칭이든 유명세에 값한다고 부담을 안고 있을 부류보다는 할 말 다하는 B급이 더 낭만적 호칭으로도 들린다. 작가는 서문에서 모든 결핍이 힘이 되었다고 적는다. 특히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상처와 결핍이 유난하다. 아홉 살 아이가 다리가 불편해서 걷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심코 듣게 된 아버지의 말이 비수가..

감상글(책) 2022.04.02

<에세이> 파리는 날마다 축제

헤밍웨이(주순애 역), 『파리는 날마다 축제』, 이숲, 2012. - 헤밍웨이 사후 발표된 『움직이는 축제』(1964)의 2010년 증보판을 번역한 것으로 오십 대 후반의 헤밍웨이가 1921년에서 1926년까지 이십대 초중반의 파리 생활을 회고하며 쓴 책이다. 파리를 방문한 경험이 없는 번역가는 파리 지도를 옆에 두고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파리를 산책하는 듯한 행복감을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 책을 읽는 내내 웬만한 여행서보다 파리를 깊이, 풍성하게 느끼는 기회였음을 생각하게 된다. 헤밍웨이와 아내 해들리는 카르디날 르무안 거리의 허름한 아파트에 살면서 센강으로 산책 나가길 즐긴다. “센 강의 지류 건너편에는 좁은 골목길과 아름답고 오래된 집들이 높이 들어선 생 루이 섬이 있다. 그곳으로 곧바로 가는..

감상글(책) 2022.03.14

<에세이> 시간의 여울

이우환(서인태 역), 『시간의 여울』, 디자인하우스, 1994. - 이 책은 라일락 뜨락(이상화 시인 생가)에서 가져왔다. 뜨락에 들른 모 출판사 쌤이 두고 간 거란다. 뜨락 쌤은 이 책을 예전에 읽었는 줄 모르고 한 번 더 읽었다고 한다. 모 출판사 쌤은 뱀에 대한 공포가 있는 줄 아는데, 이우환의 글을 보면 그런 기분도 야생을 떠난 도회적 삶에서 자신의 관념이 키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굳이 뱀에 적응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면 뜨락 쌤은 야성을 잃지 않고 뱀을 동무 대하듯 해서 경이감이 든다. 라일락 뜨락에 가면 이우환 그림은 없지만 그 이상의 라일락 나무가 그림처럼 있다. 그림 좀 그린다는 주인의 작품과 주인이 선물받았다는 청개구리돌도 볼거리다. 이것으로 책을 내주고 보관해..

감상글(책) 2022.03.12

<에세이> 고향집 앞에서

구활, 『고향집 앞에서』, 눈빛, 2005. - 구활 작가는 경북 경산시 하양읍 출신으로 전직 신문기자이면서 수필가다. 『고향집 앞에서』란 수필집엔 고향 하양과 관련된 추억이 많이 담겨 있다. 그 추억에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과 혼자서 다섯 남매를 키운 어머니 이야기가 거듭 등장한다. 달걀을 품고 있다가 쥐에게 가슴살을 뜯기고 안짱다리가 되었음에도 병아리를 챙기는 암탉의 처지를 어머니는 자신과 동일시한다. 암탉에게 말을 건네고 먹이를 주며 기특하게 생각한다. 작가 역시 암탉 일가의 모습을 ”가난과 외로움에 떨어야 하는 어머니가 이끌어야 하는 우리 가족들의 투영도”로 여기지만 그 암탉의 최후는 자식들의 몸 보신이었고, 작가는 남은 병아리를 생각하며 입맛을 잃는다. 하양은 능금이 유명했었..

감상글(책) 2022.03.06

<소설> 남극해

이윤길, 『남극해』, 신생, 2020. - 허먼 멜빌의 피쿼드 호가 대서양에서 출발하여 태평양까지 흰머리 향유고래 모비 딕을 추격했다면 이윤길의 피닉스 호는 남극해까지 나아가서 남극이빨고기를 잡는다. 피쿼드 호의 선장 에이 해브는 만선의 꿈보다는 복수심과 전의를 불태우며 모비 딕과 마주하는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피닉스 호의 강 사장과 장 선장은 만선을 꿈꾸고 그 꿈 실현 직전까지 이른다. 피쿼드 호는 백인에게 몰살당한 원주민 부족의 이름에서 빌렸는데 흰고래로부터 난파당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피닉스 호는 불사조(不死鳥) 혹은 불새의 이미지를 띠는 데 소설의 결말을 보면 이름과 반어가 되는 면도 있고 동일시되는 면도 있다. 소설은 박 기관장의 시선을 따라간다. 작가는 파국의 조짐을 치밀하게 짜..

감상글(책) 2022.02.23

<소설> 에펠탑의 검은 고양이

아라이 만, 『에펠탑의 검은 고양이』, 한길사. 2000. 자작곡 가수에다 비디오 제작자며 소설까지 쓰게 된 작가는 에릭 샤티의 음악이 자신의 현재 모습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고 했다. , , 은 샤티가 20대에 작곡한 피아노곡인데 그 무렵의 샤티를 알 만한 자료는 많지 않다고도 했다. 샤티의 임종 후 한때의 연인이었던 수잔 발라동에게 남긴 편지 한 다발이 그의 방에서 발견되었지만 수잔 발라동은 그 편지를 모두 태워버렸다. 샤티를 좀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샤티와, 수잔과, 수잔의 아들 위트릴로가 함께 찍은 사진도 편지와 함께 전달되었지만 수잔 발라동은 그 사진에서 샤티가 있는 부분만 오려낸다. 샤티와 수잔 발라동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작가는 제한된 자료에 상상력을 동원해서 샤..

감상글(책) 2022.02.15

<산문집>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더숲, 2019. - 은둔과 명상의 작가. 기인 혹은 괴짜란 인상을 주며 자본주의와 엇박자로 살 것 같으면서도 책으로 수익을 꾸준하게 내면서 시장에서 소외되지 않고 오히려 잘나가는 류시화 시인의 산문이다. 여러 스승과 그들의 훌륭한 말과 문장을 통해 인생에 도움 될 만한 이야기들을 소개해왔던 작가의 행보는 이번 산문에도 이어진다. 특히, 전설처럼 전해오는 작가 개인의 대학생활 모습이 군데군데 인용되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방만 세를 얻고 화장실을 쓸 수 없어 볼일을 대학병원 건물에서 해결해야 했던 시절, “카뮈의 실존주의 소설에 반하고 니체의 초인 사상에 심취하고, 바슐라르의 몽상 미학에 밑줄 긋던 이십 대, 오직 문학에 생을 전념하고,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감상글(책) 2022.01.27

<산문집> 단풍객잔

김명리, 『단풍객잔』, 소명출판, 2021. - 시인의 산문집이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생활 주변 이야기에 다문다문 고전을 인용한 것이 묘하게 재미를 준다. 아마도 그 재미는 시인의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을 상황에 맞게 소환해서 삶과 결부시켜 이야기하는 데서 생기는 것일 테다. 집 대문간 뽕나무 한 그루에 대해 말할 땐, 삼십 년 만에 집 밖을 나온 두생이란 분의 일화를 전한다. 두생은 십오 년 전에 딱 한 번 뽕나무 그늘에 든 적이 있었다는 고백을 친구에게 털어놓는다. 바깥출입을 삼간 것은 일이 없어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인은 두생 일화를 소개한 이유에 대해서 짐짓 말을 아끼고 독자들의 반응을 기다린다. 방에 의자 하나 놓고 지낸 두생이란 분이 딱하다기보다는 세상의 잣대에 들지 않는 기벽이 삶..

감상글(책) 2022.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