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550

<소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발터 벤야민(윤미애 옮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길, 2007. -1931년 경 『베를린 연대기』를 쓰고 몇 차례 출판이 좌절되고 조금씩 수정 보완해서 1938년경 다른 이에게 원고를 맡긴 게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이다. 저자는 나치를 피해 망명하려는 계획이 좌절되자 1940년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의 유년시절 이야기는 장면 장면의 단절된 회상과 그런 중에 어떤 의미를 환기하려는 의도에 의해서 전체적으로 연결되는 서사적 재미는 줄었지만 몇몇 인상적 장면은 이를 상쇄할 만하다. 저자는 망명 시절, 유년의 이미지를 불러 내면을 치유하는 예방접종의 효과를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고 서문에 밝혔다. 나비 채집하던 유년을 떠올리며, “나비로 가득 채워진 그 공기를 뚫고 떨림 속..

감상글(책) 2022.07.18

<소설> 장난감 도시

이동하, 『장난감 도시』, 문학과지성사, 2009(초판본, 1982) - 『장난감 도시』, 2009년 3판본과 1982년 초판본 사이에 문장을 일부 다듬고, 민감한 내용을 살짝 들어낸 것이 보인다. 시작 페이지를 보니, “내가 이 무렵의 일을 비교적 잘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오로지 학예회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도 그럴 것이, 매년 한 번씩 갖기로 되어 있는 학예회를 전쟁 통에 여러 해나 걸러 오다가 그해에야 우리는 비로소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에서 “학예회 덕분이라고 생각된다”를 “학예회 덕분이다”로, “여러 해나”를 “여러 해”로 수정한 것에서 말을 아끼는 퇴고의 묘를 맛볼 수 있다. 내용에선, 소설 말미의 ‘누나’와 관련된 이야기 열다섯 줄이 통째로 빠졌다. 독자에 따라선 납득하기 어려운 불편..

감상글(책) 2022.07.15

<에세이> 다시, 지역출판이다

신중현, 『다시, 지역출판이다』, 학이사, 2022. - 1954년 대구출판번호 1-1로 시작된 이상사(理想社). 1987년 이상사에 입사한 이래, 책 읽고 만드는 일이 마냥 좋아서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일하던 사람, 창업주의 신뢰를 얻어 이상사 경영을 잇게 되고 2007년 학이사(學而思)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까지 지역출판의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 책 파는 운까지 타고난 사람, 바로 학이사 대표인 신중현 선생이다. 배우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배우고. 학이사 이름은 인(仁)을 첫 번째로 생각하는 공자의 말에서 따왔다고 하니 놀랍게도, 거창 골짜기 어인(於仁) 마을에서 태어난 저자와 운명적으로 연결된다. 근래, 자기 스스로인지 주변에서인지 학이사 주지 스님으로 칭하는 걸 듣기도 하는데 출판사..

감상글(책) 2022.07.04

<에세이> 비가 내리는 날에는 여우가 되고 싶습니다

백우인, 『비가 내리는 날에는 여우가 되고 싶습니다』, yeondoo, 2022. - 시집 『쉼없이 네가 희망이면 좋겠습니다』를 썼던 백우인 시인이 연달아 노크하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산문집을 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여우가 되고 싶습니다』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고, 어린 왕자를 간직하고 지냈던 백우인 시인이 어린 왕자를 불러 세워서 대화한 기록이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어린 왕자 이야기에 여우의 마음으로 달아놓은 말풍선이란다. 그러니 백우인 작가의 책은 『어린 왕자』 사용법 성격도 있고, 『어린 왕자』 안의 이야기를 밖에서 끄집어내서 새로운 이야기를 보탠 것이기도 하다. 『어린 왕자』를 읽으면, 꽃을 떠나온 어린 왕자가 별에 날아온 꽃을 사랑스럽다고 여기면서 거리감도 느끼는 내용이 ..

감상글(책) 2022.06.29

<소설> 들끓는 사랑 , <소설> 돈키호테의 식당

김혜순, 『들끓는 사랑』, 학고재, 1996. 천운영, 『돈키호테의 식당』, 아르테, 2021. - 두 권의 책. 김혜순 시인과 천운영 소설가가 『돈키호테』를 들고 스페인을 여행한 기록이다. 김혜순 시인이 스페인 미술과 문학의 거장인 가우디, 고야, 피카소, 로르까의 흔적을 탐방하며, 죽음과 고통, 그 죽음과 고통을 치료하는 예술과 웃음과 풍자를 생각했다면, 천운영 소설가는 돈키호테에 언급된 음식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스페인 요리를 바탕으로 한 풍성한 음식 문화에 대해 시공을 넘나들며 자유로이 얘기한다. 『들끓는 사랑』에선 피카소를 찾아 바로셀로나 미술관에 간다. 십대 대 겪은 누이의 죽음, 스무 살에 겪은 친구의 죽음 등으로 피카소가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었다는 전기적 사실을 떠올린..

감상글(책) 2022.06.27

<소설> 목단강행 열차

목단강행 열차... 괜히 설레는 이름이다. 전광용(전광용문학전집1), 『목단강행(牧丹江行) 열차』, 태학사, 2011 - 전광용 소설가의 고향은 함경북도 북청이다. 해방 후 남북이 갈리고 서울에서 유학하던 전광용은 고향집과 서울을 어렵게 왕복하지만, 서울을 다녀왔다는 이유만으로 감금이 되어 곤경을 치른 후 1947년 봄, 서울로 내려왔고 그 이후 전쟁과 분단을 겪으며 다시 고향에 가지 못한다. 자전적 소설 『목단강행(牧丹江行) 열차』는 고향을 얘기한 작가의 수필 내용이 상당 부분 반영된 걸 보면 ‘그’라는 삼인칭을 쓰지 않았으면 수필로 보아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의 고향 북청은 여진족의 유적으로 알려진 옛 성터가 남아있는 곳이고,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만령 시중대의 바닷가 경치도 좋단다. 서울에서 북청..

감상글(책) 2022.06.23

<에세이> '사랑이 밥 먹여준다' 와 '영성에의 길'

김하종, 『사랑이 밥 먹여준다』, 마음산책, 2021. 헨리 나우웬(김명희 역), 『영성에의 길』, IVP, 2002. - 남을 돕고 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실천은 못해도 마음은 그렇다. 대체로 종교인들이 실천까지 이어지는 경우를 종종 봐왔기에 비록 나 자신은 무교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이웃을 챙기는 종교인을 흠모하게 된다. 근래 다른 분의 소개와 선물로 온 두 권의 책에서 만난 김하종과 헨리 나우웬도 훌륭한 종교인이란 생각이 든다. 먼저, 김하종의 『사랑이 밥 먹여준다』를 보자. 이탈리아 소년 빈첸조는 어릴 때 친구들로부터 맞고 울면서도 맞서 싸우고 때리는 일은 주저하는 친구다. 읽고 쓰는 일이 또래보다 더딘 난독증도 있었다. 자신과 주위에 그늘을 드렸을 난독증이 오히려 타..

감상글(책) 2022.06.12

<그림 에세이> 박고석

박고석, 『박고석』, 열화당, 1994. 산을 즐겨 그려 산의 화가라 불리는 박고석(1917-2002)은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숭실중학교에 다닐 무렵, 모든 종류의 스포츠를 좋아하고 싸움도 곧잘 하는 소년이었다. 그런 중에 화구를 메고 기자묘나 능라도 등에서 자연을 화폭에 담는 데 열중한다. 건강한 심신의 피로를 맛보는 게 그림의 매력이었단다. 일본 유학 중 해방 되어 고향인 평양에 머물던 박고석은 첼리스트 전봉초와 함께 남으로 내려오고 이후 이산가족이 되었지만 『박고석』 책에서 고향 이야기와 부모님 이야기는 많지 않다. 집필을 위해 따로 쓴 것이 아니라 그간 쓰거나 발표했던 글을 모은 것이다 보니, 할 말은 많아도 미처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52년 12월 피난지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감상글(책) 2022.06.01

<여행 에세이> 스무 색깔 스무 느낌

박운석, 『스무 색깔 스무 느낌』, 상상나무, 2007. - 신문기자 시절, 작가는 여행 코너를 맡아 전국을 부지런히 다녔다. 이 책은 발품 팔아 다닌 곳 중에서 경상도 여행지를 답사하고 소개한 책이다. 예천 회룡포, 안동 봉정사, 청송 절골, 합천 황매산, 경상북도 수목원과 기청산 식물원, 통영과 연화도 등 소개된 여행지는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비교적 분잡하지 않은 곳이다. 물질과 자본의 침투를 살짝 비켜 있으면서 자연 속에서 인문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책이 출간된 지 십오 년 되었고 그간 세상이 많이 바뀌었음에도 관련 여행지를 이해하는 데 당시와 현재의 시차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작가가 안내해준 여행지는 이전 날 내가 즐겨 다녔던 공간과 꽤 일치한다. 작가는 여행지..

감상글(책) 2022.05.29

<소설> 벽오금학도

이외수, 『벽오금학도』, 동문선, 1992.( 해냄, 2014)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선계)을 잇는 묵림소선의 그림 한 장. 족자 속 그림엔 금학 한 마리가 날개를 펴서 벽오동나무 위로 내려앉고 아래에 있던 동자 한 명이 그걸 무심히 쳐다보는 광경이 나온다. 주인공 은백이 우연찮게 건너간 선계에서 얻은 그림이다. 선계에선 금학이 자유롭게 오가고 그림을 뚫고 나오기도 한다. 은백은 자신의 이름처럼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 이쪽 세상으로 건너온다. 들고온 그림만이 저쪽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열쇠인데 비밀의 문을 열기 위해선 인연 있는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게 소설 기본 얼개로 작용하고 있다. 은백의 고향집은 농월당이다. 반은 신선 같은 할아버지, 집을 비운 아버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할머니가 ..

감상글(책) 2022.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