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550

<소설> 봄의 신부

장정옥, 『봄의 신부』, 학이사, 2020. - ‘봄의 신부’는 2003년 대구지하철 1호선 화재사고로 숨진 192명의 희생자에 대한 진혼곡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음악 밴드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청년의 때 이른 죽음과 주변 연인과 친구의 이야기가 엮이면서 서사를 형성한다. 서사는 보다 단순하지만 ‘환(還)’과 ‘내가 없는 그곳은’이 주는 여운도 오래 남을 듯하다. ‘환’은 시각장애인이, 각막을 기증하고 세상을 뜬 경륜 선수의 고향 집을 방문하는 얘기다. 일련의 일들이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는지 돌아오는 버스에서 주인공은 “정말, 꿈을 꾼 것인지” 묻는다. 세상일들이 꿈인지, 현실인지, 꿈같은 현실인지, 그도 저도 아닌 무엇인지……. 내일을 모르는 사람에겐 답도 궁할 뿐이다. 마지막에 수록..

감상글(책) 2021.01.06

<산문집>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하나

변영림,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하나』, 북인, 2006. 저자인 변영림은 정진규 시인의 아내다. 크리스마스 이브 쌀독이 비었을 때, 원고료로 쌀을 사오겠다고 나선 남편이 술이 억병으로 취해서 새벽에 돌아왔는데 가방엔 쌀 대신 책만 가득하더라며 한때의 정진규를 기록해둔다. 남편이 고향 안성에 집을 짓겠다며 원하는 집을 물어왔을 때 변영림은 이렇게 쪽지로 답한다. 이 요구도 쉽지 않은 것을 느낄 무렵, 변영림의 쪽지는 다른, 멋진 집으로 돌아온다. 정진규의 시다.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 정진규 남들도 다 그런다하기 새 집 한 채를 고향에 마련할 요량으로 그림을 그려가다가 늙은 아내도 동참시켜 원하는 걸 그려보라 했더니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하나와 원추리랑 채송화가 피는 장독대가 있는 집이면 되었다고..

감상글(책) 2020.12.27

<평론> 씨 뿌린 사람들

백기만, 『씨 뿌린 사람들』, 사조사, 1959. 백기만, 『씨 뿌린 사람들』, 사조사, 1959. 1959년 1월 백기만은 누가 읽어도 많은 영양소를 얻을 수 있는 글이라며 자신하면서, 대구 경북권 예술가들의 삶을 다룬 『씨 뿌린 사람들』을 출간한다. 백기만은 이미 『상화와 고월』(1951)을 써서 이상화와 이장희의 삶이 세상에 오래 남을 수 있도록 기록해둔 장본인이다. 동향의 현진건, 이상화, 이장희 그리고 이들과 교류했던 오상순, 양주동 등과 두루 친분이 있었던 인물이며, 평전도 쓰고 시도 남겼지만 생전에 자신의 시를 시집으로 엮지 못했다. 『씨 뿌린 사람들』에 언급된 10명의 주인공들은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 영화감독을 망라하는데 실제 백기만은 현진건에 대해서만 글을 쓰고 나머지는 고인과..

감상글(책) 2020.12.25

<에세이> 시를 찾아서

전봉건, 『시를 찾아서』, 문명사, 1968 - 전봉건 시인은 1928년 생이다. 일본어로 교육받고 사고하며, 해방 후 한글을 새로 배워야 했던 세대라고 김현은 『시인을 찾아서』(1975)에서 말했다 비슷한 제목의 『시를 찾아서』는 1968년에 나왔으니 시론에 관한 책이 많지 않았던 시절, 주의를 끌만한 책이었을 것이다. 그와 논쟁이 있었던 김수영은 1968년 6월 교통사고를 죽었으니 이 책을 읽진 못했겠다. 전봉건은 시라는 것이 1+1=2의 세계가 아니라, 1+1=0이거나 1+1=3인 세계라고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다. 계산이 서지 않을 만큼 개성과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시의 현실 참여를 고민하는 김수영과 각을 세우면서 자신의 이론을 심화시켜 나갔을 걸로 보인다. 전봉건은 바흐를 좋아한..

감상글(책) 2020.12.07

<에세이> 책꽂이 투쟁기

김흥식, 『책꽂이 투쟁기』, 그림씨, 2019. - 책 읽기와 책 쓰기를 주업으로, 출판사 운영을 부업으로 하는 저자다. 주업과 부업이 바뀌어도 상관없겠다. 출판 일도, 읽고 쓰는 일도 책과 불가분의 관계로 밀착되어 있다. ‘책꽂이 투쟁기’는 책에 대한 소개며 기록이지만, 그 소개와 기록(쓰기)은 책 읽기의 부산물일 수밖에 없다. 기록의 과정에 책 읽는 사람의 개인사와 인생관이 묻어나는 건 읽기의 또 다른 재밋거리다. 남의 책꽂이를 엿보는 것 또한 즐겁기만 하다. 책꽂이에, 책을 모셔 오기 위해선 우선 책값을 벌어야 한다. 밥값 아껴 어렵게 구입한 책을 안 읽고 쌓아두는 건 면목이 안 선다. 읽고 싶은 책은 늘어나고 소용되는 시간은 한계가 분명하다. 저자는 그 간격을 간독으로 줄인다. 저자가 말하는 간독..

감상글(책) 2020.11.30

<사진 에세이> 장에 가자

정영신, 『장에 가자』, 이숲, 2020. - 정영신 사진작가는 지난 삼십오 년간 시골 장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시장 사람들 이야기를 전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작가의 말처럼 시골장터 모습은 “그 지역의 삶이 그대로 펼쳐진 한 폭의 풍속도”다. 여기에 “인정 넘치는 백성의 문화 공간” 기능에도 주목한 작가는 시장 안팎의 고유문화까지 두루 섭렵해서 소개한다. 시장을 찾은 작가가 지역 문화재에도 관심이 있는 걸 알고, 금산장의 오정숙 할매는 보석사 은행나무에 다녀갈 것을 권한다. 작가는 기꺼이 발품을 팔아서 1,100년 수령의 은행나무 품을 친견한다. 때때로 운다는 나무의 신이한 행적도 시장 사람들의 삶과 무관해 보이진 않는다 . 금산장에서 반가이 만난 양 씨 할매는 30년 전에 빵틀에서 구워져 나온 붕..

감상글(책) 2020.11.23

<에세이> 라틴어 수업

한동일, 『라틴어 수업』, 흐름출판, 2017. - 저자는 공부를 많이 해서 바티칸 대법원의 변호사 자격까지 얻고 국내 대학에서 라틴어 강의를 맡기도 했다. 이 책은 그때 강연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저자는 지식인과 지성인을 구별하며,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을 나누고 실천할 줄 모르면 지성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한다. 저자는 Do ut tes(도 우트 데스 : 네가 주기 때문에 내가 준다)란 말을 좋아한다. 상호주의가 깨지는 국제정세를 언급하며, 국익을 내세워 정권을 잡은 이들이 다문화주의 정책에서 반 이민정책으로 돌아선다든지 다수의 세력을 등에 업고 소수 종교를 핍박하는 일들을 걱정한다. 개인관계에서도 타인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행할 것인지 고민하..

감상글(책) 2020.10.30

<에세이> 당신이 나의 백신입니다

김동은, 『당신이 나의 백신입니다』, 한티재, 2020. 코로나19가 대구를 중심으로 확대일로에 있을 무렵, 어딘가 급하게 뛰어가는 의사의 사진 한 장은 매우 특별해 보였다. 아마도, 코로나 극복을 위한 가수들의 헌정곡 ‘상록수(김민기 작사, 작곡)’ 영상에 사진 한 컷이 있다는 얘길 듣고 찾아보았을 성싶다. 사진의 주인공은 병원 의사로 또 교수로 일하면서 바쁜 중에도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웃을 돕는 김동은 선생이면서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사진 속 저자는 방호복을 벗은 것으로 보아 잠시 쉬는 시간이었을 거 같은데 응급 상황이 생겼는지 전력으로 달려가는 모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이마에 길게 반창고를 붙였는데, 조여 쓴 고글이 살을 파고드는 걸 방지하는 효과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나중에 알았다. 물..

감상글(책) 2020.10.22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최인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범우, 2014. 『광장』(1960)의 작가 최인훈의 희곡이다. 1969년 ‘온달’과, 온달이 죽게 된 배경을 파헤친 ‘온달2’를 발표하고 그 중에 ‘온달’을 일부 개작하여, 1970년 11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제목으로 공연했다. 아마도, 같은 제목의 김환기의 그림이 그해 한국미술대상 전람회에 출품되어 6월경에 대상을 받았으니, 그 그림에 대한 인상이 남았다가 연극 제목으로 차용했을 것이다. 김환기의 그림 (1970)는 성북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 즐겨 읽으며 마지막 시구를 빌려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이후, 노래가사가 되어 유심초의 노래로 불리기도 했다. 김환기 사후, 환기재단에서 출간한 김환기 에세이의 제목도 ..

감상글(책) 2020.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