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550

<에세이> 길을 잃는 것이 길을 찾는 길이다

박주하, 『길을 잃는 것이 길을 찾는 길이다』, 행복한책읽기, 2020. - 중고등학교 시절, 등·하교용이나 신문 배달용으로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를 타고 멀리 나갈 일은 드물었다. 기껏해야 동네나 시장, 도서관 다닐 때 이용했을 것이지만 자전거는 퍽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양손을 놓고도 몸을 부리면서 방향을 바꾸는 재주라든지 앞바퀴를 들고 낮은 턱을 넘는 기술에도 재미를 내곤 했다. 그러다가 김훈의 『자전거 여행』(2000)을 읽고, 자전거가 낯선 지방 먼 거리를 여행하는 데도 쓸모가 있음을 알았다. 김훈은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했다. 자전거 여행은 가보지 않은 길을 가슴에 품고 몸을 써서 바퀴를 굴려 그 길을 느끼는 일이다.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고, 숨은 역사..

감상글(책) 2020.10.11

<에세이> 생태평화를 찾아 마을로 간 신부

정홍규, 『생태평화를 찾아 마을로 간 신부』, 학이사, 2014. - 정홍규 신부는 가톨릭이 가톨릭 안에 갇히지 않고 그 신앙과 역사가 마을로 우주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지역 성당에 있을 땐 담장 허물기 사업에 나섰고, 도농직거래 장터를 운영하는 일을 주도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또 성당과 마을을 연결하며 주변에 도움 되는 일을 하고자 한 것이다. 경쟁 프레임이 작용하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 산자연학교를 운영한 경험도 소개한다. 신부답지 않게 학생에게 회초리를 대고 자책하는 시간을 겪으며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아이들과 나 자신의 취약한 점을 이야기하고 약점을 서로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며 좋아진다는 것이다. 아이들과 서로의 약점을 이야기하길 바란..

감상글(책) 2020.10.08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한슨(임호경 역),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열린책들, 2013. - 톰 소여나 허크, 보물섬의 짐 호키슨 등 십대 소년의 모험에 푹 빠져 지내던 시절이 있었고,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도둑질하는 루팡, 도둑을 잡는 홈즈처럼 어른들의 모험에도 들떠 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100세 노인의 모험은 뜻밖이다. 100세 생일을 앞두고 양로원 탈출에 성공한 알란이 돈이 든 트렁크를 훔치기로 작정하면서 모험은 시작된다. 갱단의 추적과 추적을 따돌리는 활극 속에 알란의 지난 시절이 중간중간 이어지는 이야기 구조다. 알란은 이념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야기를 아주 싫어한다. 좌파와 우파 사이, “세상을 이전과 정반대로 바꾸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이면엔 자신의 ..

감상글(책) 2020.10.04

<에세이> 경계에서의 글쓰기

오민석, 『경계에서의 글쓰기』, 행성B, 2020.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인기 칼럼을 책으로 엮었다. 오민석 작가가 친절하게 페북에도 연재해주었기에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정돈된 논리와 깊이 있는 시각을 얼마쯤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를 재차 확인하고 음미하는 시간 역시, 새로운 앎과 재미가 더해지는 걸 느낀다. ‘불일치의 정치학을 위하여’에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기 정치의 활력을 스스로 죽이는 일임을 말하며, 무분별한 색깔론이나 경직된 이념을 버리고 정책으로 불일치를 만들 것을 권장한다. ‘낡은 신화의 베개에서 코를 고는 사람들’에선 재벌이라서, 대통이라서, 남성이라서, 윗사람이라서 자연스레 누리던 특권이 더 이상 존중받지 않는 시대임을 분명히 한다. 종..

감상글(책) 2020.09.20

<에세이> 풍류세시기

이승만, 『풍류세시기(風流歲時記)』, 중앙일보·동양방송, 1977. 이승만(1903-1975)은 화가이면서 삽화가다. 이 책은 이승만이 잡지에 연재했던 생활세시기(生活歲時記)와 과인풍물지(過人風物誌)를 사후에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생활세시기는 잊혀져가는 세시풍속을, 과인풍물지는 주변의 예술한다는 사람들의 특별난 모습들을 소개한 글이다. 중간 중간 화가가 직접 그린 삽화를 곁들이고 있는데 표지화로 뽑힌 이상과 구본웅의 모습이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생활세시기의 한 대목을 보자면, 묵은세배를 모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묵은세배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를 얘기한다. “섣달 그믐날 친척집 어른이나 세교(世交-대대로 사귀어온 친분)로 맺어진 집안들을 찾아서 묵은세배를 드리게 된다. 묵은세배의 진의는 오는 정초 설..

감상글(책) 2020.09.01

<가사> 내방가사 이야기

권숙희 『내방가사 이야기』, 달구북, 2019. 조선시대 한글문학으로 짧은 시에 해당하는 것이 시조라면, 긴 시에 해당하는 게 가사 문학이란 생각이 든다. 시조의 양식을 살리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더 하기 위해 시조 중장을 길게 늘여서 쓴 사설시조도 있다. 시조와 가사는 네 마디 반복인 4음보로 운율감을 주며, 작자층이 주로 남성 양반이란 공통점이 있다. 권숙희 시인이 이번에 선보인 『내방가사 이야기』는 제목에서 보듯 여성들에 의해서 쓰인 작품이다. 책을 읽으며 세 번 정도 놀랐는데, 전문 혹은 일부가 소개된 내방가사의 양이 결코 적잖은 데 놀랐고(지금도 두루마기 형태로 가정에 보관되어 읽기를 기다리는 작품이 상당하다는 얘기도 들은 듯하다), 그 작품의 정서적 울림이 크다는 데 놀랐고, 시인이 속한..

감상글(책) 2020.08.28

<소설> 돈키호테

세르반테스(박철 역), 『돈키호테』, 시공사, 2004. (돈키호테 1편 1605년, 2편 1615년) - 편력기사 영웅담을 너무 많이 읽은 나머지, 자신이 그런 기사라는 착각에 빠져든 돈키호테. 편력기사로서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한 둘시네아 공주를 위하고, 악을 누르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돈키호테는 모험에 나선다. 꿈꾸는 것에 대한 동경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모험의 주체가 되어 꿈을 행하는 도저한 낭만성이 돈키호테의 매력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런 낭만의 대가를 비싸게 치르게 한다. 돈키호테는 무모하게 돌진하고 철저하게 깨진다. 돈키호테가 행하고 당하는 매번의 장면은 한바탕 활극을 보는 듯 요란스럽다. 돈키호테만큼 비쩍 마른 말인 로시난테와 섬의 영주를 약속받고 종자가 되어 따라간 산초 판사는..

감상글(책) 2020.07.05

<에세이> 박상미의 고민사전 - 나를 믿어야 꿈을 이룬다

박상미, 『박상미의 고민사전 : 나를 믿어야 꿈을 이룬다』, 특별한 서재, 2019. - 저자인 박상미쌤은 남을 위해 사는 데 시간을 쓰고 보람을 느낀다. 그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운동화를 가지고 다니며 짬을 내서 운동도 시작한 걸로 알고 있다. 저자는 교도소 재소자를 위해 문학 치유, 영상 치유를 무료로 하고 있다. 대학 강의에 바쁜 중에도 청소년을 위한 마음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지지해준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박상미의 고민사전을 신문에 연재했고 책으로도 묶었다. 책이 많이 팔려도 개인 통장에 들어가는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전자신문에 실리거나 페이스북에 올려준 저자의 고민 상담 내용을 읽으며 크게 도움을 받기도 했다. 사춘기 청소년의 이..

감상글(책) 2020.06.07

<에세이> 태일과 함께 그늘을 걷다

강성규, 『전태일 평전』, 한티재, 2020. 1989년 『전태일 평전』을 복사본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때는 저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바로 다음해 조영래 변호사가 저자란 것이 밝혀졌지만 조영래는 자기 이름의 전태일 평전을 보지 못하고 마흔 중반의 나이로 병사한다. 평전은 전태일의 수기와 일기를 바탕으로 전태일의 어머니와 여동생 등 가족을 여러 차례 만나며 삼 년 이상 정성을 들여 쓴 책이다. 1970년, 스물세 살 청년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어머니와 친구들이 앞장서기도 했지만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과 이후의 노동운동을 크게 도운 셈이다. 장기표가 취재 노트를 넘겨주었다고 하지만 조영래로 하여금 책 쓰기에 집중하게 한 것은 결국, 전태일이라고 해야겠다. 이번에 강성규 선생이 쓴 『태일과..

감상글(책) 2020.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