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46

녹동서원에서

사야가 혹은 김충선 / 이동훈 임금의 성(姓)이 갈리면 역성혁명이니 장군의 국적과 성을 바꾸는 일도 자기혁명쯤은 되지. 혁명 소문이 도는, 우미산 자락 녹동서원 임진년에 조총 부대를 이끌고 바다 건너온 사야가는 스스로 조선에 투항하여 부득불, 어제의 동지에게 조총의 총구를 겨누지. 이런 비운을 무릅쓴 것은 침략 전쟁의 영웅 대신 평화의 첨병이고픈 마음에서이지. 이쪽이든 저쪽이든 임금을 향한 충(忠)은 아닌데 오지랖 넓은 군신들의 챙김으로 사야가는 김해 김씨 성에다 충선(忠善)이란 이름까지 받지. 사야가에서 김충선으로 부침이 유난한,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욕이 엇갈린 삶이 이름에 고단하게 앉은 거지. 쇠붙이에 녹을 입히던 세월도 잠시 서로 간에 칼싸움, 입 싸움, 신경전은 언제든 살아나지. 우록리 녹동서원을..

자작시 2010.11.21

무협지를 읽으세요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dokken0109 무협지를 읽으세요 / 이동훈 삶이 길다고 푸념하지 마시고 그런 날엔 무협지를 읽으세요. 재미는 기본, 생의 비결은 덤이라지요. 첫머리에 등장하는 센 수염과 팬 주름의 노인을 만났나요. 칼로 일가를 이룬 뒤 칼을 걱정하다가 칼에 맞는 운명이죠. 칼끝은 노인의 아들마저 겨누어 벼랑으로 밀지만 죽지 않는 건 아시죠. 바닥은 새로운 기회인걸요. 전설의 고수를 만나 절정의 무공을 익히며 애송이 티를 벗죠. 우연의 남발이라고요. 설마, 누군가의 도움 없이 당신이 예까지 왔다고 생각하진 않겠지요. 복수의 일념으로 진도를 쓱 빼는 중에도, 악당의 칼 솜씨가 만만찮고 악당을 닮지 않은 딸로 인해 일이 꼬이기도 해요. 마음 가는 대로 칼이 움직인 뒤..

자작시 2010.11.08

민들레의 푸념

- 민들레 / 이동훈 넌, 사랑스러워. 담벼락 밑, 미루적미루적 내민 얼굴 안녕, 인사하면 앙칼지게 삐죽 삐치는 이파리, 그 작은 성질머리. 골목 안, 그늘을 애써 거두어 스스로 먹먹해진 눈빛 그 낱낱의 빛을 어둔 구석방에 쬐고 싶어 너를 안고 들어온 날 내 얼굴이 먼저 피어났건만 잠시, 잠깐이었어. 이제껏 숱한 낮밤을 열고 닫았을 너 무엇이 조급증을 키웠을까. 제 몸의 빛을 바깥으로 죄다 밀어내고 하루 만에 늙어 툭, 떨어져 나갈 줄이야. 꽃자리에 든 어린 씨앗도 놓아 달라고 움찔대는 저녁 단단하게 여윈 몸에 봄을 다 살지 못한 푸념만 살아. 난, 길들고 싶지 않아.

자작시 2010.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