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550

<에세이> 숲과 대화할 시간입니다

김태일, 『숲과 대화할 시간입니다』, 학이사, 2023. - 무슨 일이든 그 일이 좋아서 시작한 것이라는 가정 하에 10년 차가 되면 그 일에 익숙해지고,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이 더 깊어지고 그런 만큼 그 일의 가치와 매력에 대해서 할 말이 풍성해진다. 모든 스포츠를 섭렵한 저자는 테니스에 푹 빠져 가정에 소홀했던 시절도 있었고 골프, 탁구 등에도 상당한 시간을 바쳤지만 그가 정작 미는 것은 순간적으로 힘을 써야 할 스포츠 대신에 숲속 걷기다. 저자는 앞산 자락 고산골 숲 걷기 10년 차다. 이 책은 숲 걷기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10년 차의 시각을 넘어서 30년, 40년 고수의 아우라가 있다. 숲 걷기보다 오래 이어온 신문기자의 감각으로 고산골을 30년, 40년 찾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포함해서 고산..

감상글(책) 2023.07.26

<에세이> 방울 슈퍼 이야기

황종권, 『방울 슈퍼 이야기』, 걷는사람, 2023. - 『방울 슈퍼 이야기』는 황종권 시인의 재미나는 에세이집이다. 방울 슈퍼는 시인의 어머니가 여수에서 운영하던 가게 이름이고, 가게에 딸린 방 한 칸에서 식구가 살았다고 한다. 시인은 집안 문제로 할머니 댁에서 맡겨져 자라기도 했는데 이번 에세이집에서 방울 슈퍼를 중심으로 시인의 유년 시절 기억이 다수 소환된다. 방울 슈퍼의 주인아주머니인 어머니는 슈퍼 금고를 도둑맞고 눈물을 보이면서도 남을 의심하는 일을 꺼렸다. 아들에게 주변을 챙기는 사람이 되라는 주문도 수시로 한다. 여행지에서 남이 버리고 간 오물을 줍는 것으로 아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책의 적잖은 부분은 어머니에 대한 헌사이기도 한데 특히, 아들의 중학교 선생이자 ..

감상글(책) 2023.07.17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2022. -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실제 빨치산 출신이다. 1990년 출간되었다가 판매 금치 처분을 당하기도 했던, 작가의 『빨치산의 딸』(1990)을 읽으면 두 분의 생각과 삶이 어떠했는지 혁명이 좌절된 반공사회에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나 순서를 달리해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먼저 읽게 된다. 작가 나이 스물다섯에 쓴 『빨치산의 딸』은 부모의 증언이 토대가 되었던 소설이지만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그로부터 30여년이 더 지나서 작가의 시선이 전보다 많이 투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전작을 읽지 않으니 표현이 애매해진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3일간의 장례식장 풍경이 이 소설의 중심축이며 여기에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이 평..

감상글(책) 2023.07.01

<산문> 득량, 어디에도 없는

양승언, 『득량, 어디에도 없는』, 글을낳는집, 2023. - 작가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평생 화두로 품고 지낸다. 근래 2년여를 머물며 이곳이야말로 최적의 고장이라고 얘기하고 책으로 엮게 된 곳이 바로 남도의 장흥, 보성, 고흥으로 이어지는 득량이다. 작가가 인연이 되어 머문 곳은 보성 일림산 정씨고택과 삼의당이다. 보성과 득량만에 대한 작가의 사랑은 지극하다. “보성 지역을 간략하면 동벌서포라고 할 수 있다. 동쪽에 벌교가 있고 서쪽에 율포가 있다는 뜻이다...또 다른 표현으로 옮기자면 동꼬서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동쪽 벌교는 꼬막이, 서쪽 율포는 낙지가 대표적 먹거리라는 의미다”. 해산천야(海山天野) 즉, 바다와 산과 들판과 하늘을 고루 갖춘 “천혜의 땅은 대한민국 남..

감상글(책) 2023.06.25

<에세이> 숲에서 한나절

남영화, 『숲에서 한나절』, 남해의봄날, 2020. - 숲 해설사이기도 한 작가는 자연을 친구로 두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한다. 자연은 발견의 기쁨을 주며 주변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주고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준다. 자연이란 친구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쓴다고도 했다. 작가는 꽃다지의 로제트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다. 로제트는 뿌리잎이 땅에 바짝 붙어 방사형으로 자라는 식물이다. 방사형은 중심이 되는 한 점에서 거미줄이나 바큇살처럼 뻗어 나간 모양을 일컫는데 냉이, 달맞이꽃, 민들레, 지칭개, 꽃마리, 개망초 등이 로제트 형이다. 로제트 형 식물은 꽃대를 밀어올리고 성장하면서 “아래쪽 잎과 줄기에 햇빛이 잘 들게 하기 위한 생태적 선택”을 통해서 원래의 모습을 바꾸어 간단다. ..

감상글(책) 2023.06.16

<에세이> 흘러간 내 영혼의 먼길

조지훈, 『흘러간 내 영혼의 먼길』, 문음사, 1977. - 조지훈(1920-1968) 시인 사후에 출간된 산문 모음집이다. 책의 제목 『흘러간 내 영혼의 먼길』은 시인의 시 「낙엽」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전략) 하나 둘 구르는/ 낙엽을 따라// 흘러간 내 영혼의/ 머언 길이여// 바람에 낡아가는/ 고목 등걸에/ 오늘도 하루해가/ 저무는구나”로 마무리되는 시편이다. 인용 수필 중 ‘돌의 미학’은 돌이 가진 추상의 미를 조지훈 시인 자신의 인생과 결부지어 쓴 글이다. 일본 쿄토 묘심사 정원의 돌,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산방에서 일 년 남짓 머물면서 바라본 돌, 경주 토함산 석굴암에서 마주했던 피가 도는 돌, 피난지 대구에서 바라본 집채보다 큰 바윗돌 얘기를 한다. 이후 성북동에 서른세 해를 머물며..

감상글(책) 2023.06.04

<소설>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김연수 역), 『대성당』, 문학동네, 2007. -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모음집. 레이먼드 카버는 1938년 미국 오리건 주에서 가난한 제재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른 결혼에 이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한동안 알콜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시절이 있었다. 마흔에 이르러서 금주에 성공했으나 아내와 헤어졌다. 곧이어 「대성당」(1983) 등으로 문명을 떨치기 시작했으나 1988년 암으로 작고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알콜 의존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소설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 단편 「칸막이 객실」의 마이어스는 이혼 후 혼자 사는 남자다. 8년 만에 아들의 편지를 받고, 아들이 있는 스트라스부르에 갈 생각을 한다. 아들에 대한 기억은 부부싸움 중인 마이어스에게 아들..

감상글(책) 2023.05.21

<에세이> 학교를 떠난 아이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김양식, 『학교를 떠난 아이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학이사, 2023. - 저자는 중고등학교에서 33년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대부분의 교사가 기피하는 학생부장과 생활지도 일을 20년 이상 맡았다고 한다. 현장에서 학교폭력을 다루는 핵심 관계자로 재직해온 것이다. 책에 소개된 사례들은 오늘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교폭력의 실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이 아닌, 안타까운 현주소다. 저자는 학생 개개인에 대한 인정과 지지를 거듭 말한다. 학교폭력 가해자는 그만한 배경을 축적해온 결과다. 가정의 부모, 주위의 어른들의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학교폭력에 관한 다양한 사례와 처리 과정을 접하면서 학교폭력이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학교폭력 가해자에 대한 추궁과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

감상글(책) 2023.05.13

<에세이> 풍경의 에피소드

이창윤, 『풍경의 에피소드』, 시와에세이, 2023. - 명륜동, 용산동, 상도동, 신림동 지하실 셋방, 난곡동, 부천, 영등포. 그리고 대구. 이창윤 시인이 살았던 곳이다. 용산동과 후암동은 해방촌이 있는 남산도서관 일대인데 이 시절 어머니를 여읜다. 용산동의 어린아이는 훗날 시인이 되어 이때의 슬픔을 “기억의 안간힘은 펄럭임도 없이/ 정지화면으로 멈춰 있네요”(「기억의 처음」)로 표현해 두었다. 상도동은 아버지가 빚쟁이를 피해 간 곳이다. 그 무렵 굶주린 남매들에게 아버지는 집의 괘종시계를 저당 잡히고 그 돈으로 국수를 사준다. 이 때의 심정은 시 「그날의 국수」로 남았다. 시인에게 괘종시계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난곡동으로 이사하면서 시계는 시간을 틀리게 알려주고 아버지도 부쩍 늙어간다. 괘종시계..

감상글(책) 2023.05.07

<에세이> 시지프스를 위한 변명

윤일현, 『시지프스를 위한 변명』, 학이사, 2016. - 『시지프스를 위한 변명』은 시인이면서 교육평론가인 윤일현 저자의 교육 인문학 혹은 인문학 교육 같은 책이다. 동서양 고전과 인물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에 사회 변화상을 읽고 교육 전문가의 생각을 더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저자가 한 손에 책을 든 정치인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마오쩌둥이 60세에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영어 공부를 시작할까 말까 고민하는 오십 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이어서 스티커 한 장을 붙인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호찌민도 여행과 독서를 통해 지도자 역량을 쌓은 걸로 소개되어 있다. 저자 자신도 독서광의 매력을 발산한다. 신호대기 중에 『말테의 수기』를 잠깐 읽는다는 게 뒤차가 경적을 울리고 심지어 ..

감상글(책) 2023.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