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550

<에세이>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노정희,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학이사, 2023. 노정희 수필가의 요리 관련 에세이다. 요리법뿐만 아니라 해당 요리에 대한 이전의 기록을 살피며 역사적이고 민속학적인 자료도 알뜰히 소개한다. 작가는 약선설계사이기도 하다. 요리의 영양이나 효능을 살피며 어떻게 하면 요리를 통해 더 좋은 기운을 더 얻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유용한 지식이 많다. “더덕 요리에 고추장을 사용하는 것은 찬 성질에 뜨거운 성질을 넣어 조화를 맞춰주는 것이다. 잔뿌리가 많은 것은 말렸다가 물을 끓였다. 대추를 넣어서 끓이며 차로써 손색이 없다. 감기 기운이 있을 때는 생강을 넣어 끓이면 그만이다”라고 했다. 더덕의 효능을 취하면서도 개개인의 몸상태에 따라 고추장, 대추, 생강 등의 더운 성질의 음식으로 보완을 꾀하는 방..

감상글(책) 2023.12.09

<에세이> 강가의 아틀리에

장욱진, 『강가의 아틀리에』, 열화당, 2017(초판 1975, 중판 1986) - 장욱진 화가(1917〜1990)의 회고전이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2024.2.12.)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초창기 작품부터 250여점이 전시되어 볼거리가 많다는 입소문이 돈다. 전시회 날짜를 확인하며 『강가의 아틀리에』를 읽는 시간을 갖는다. 언제적 교과서에서였을까. 그의 (1951)을 한참 본 기억이 있다. 노란 보리밭을 지나 고향집(충남 연기)으로 돌아오는 사내는 검은 정장에 검은 가방과 검은 우산을 든 모습이다. 장욱진이 알고 있지는 못했겠지만 몽마르트에 온 에릭 사티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긴 했다. 장욱진은 피란 시절의 혼란 속에서 불안과 초조가 자기를 감쌀 때 이곳 고향에서 “시험지와 말라버린 물감 몇 개”로 미..

감상글(책) 2023.11.22

<에세이>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

한국문화분권연구소 김용락,박상봉 편저,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 마음시회, 2021. - 백기만 시인은 『상화와 고월』(1951)에 이어 『씨뿌린 사람들』(1959)을 통해서 이상화와 이장희뿐만 아니라 대구 경북의 예술인들의 삶과 예술을 채록하고 세상에 알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분이지만 본인의 책을 따로 엮지 못한 데다 한 세대가 바뀌어가는 동안 별다른 조명도 받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해서 기획된 책이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이다. 1부는 백기만에 대해서 살피고, 2부는 『씨뿌린 사람들』에 언급된 예술인들을 다시 호명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씨뿌린 사람들』(1959)은 작고 예술가들을 가까이 알고 지냈던 인물이 글을 쓴 것이라면, 이번 책은 이후에 축적된 자료로 원전을 ..

감상글(책) 2023.11.05

<에세이> 사람이 사는 미술관

박민경, 『사람이 사는 미술관』, 그래도봄, 2023. - ‘당신의 기본 권리를 짚어주는 서른 번의 인권 교양 수업’. 책 표지에 나온 글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소속으로 인권 교육을 담당했던 저자가 들려주는 인권에 관한 이야기가 책의 주된 내용이며, 그림은 이야기의 실마리 혹은 매개로 작용하고 있다. 소싯적 달력 명화를 보면서 그림에 빠져들었던 경험,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의 그림을 실제 보면서 설렜던 감정 등 그림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전공인 인권을 만나서 저자 스스로 흥을 내면서 글을 썼다는 인상을 받는다. 난해한 이론이나 단순한 지식 나열을 피하고 삶과 결부된 인권의 여러 측면과 그 의미까지 쉽게 풀어쓴 것도 이 책의 장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여성, 노동, 차별과 혐오 등의 목차에 따라 소개..

감상글(책) 2023.10.23

<영화 에세이> 호우시절

백정우, 『호우시절』, 피서산장, 2022.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6. - 『호우시절』은 백정우 영화평론가의 네 번째 영화 이야기로서 비를 소재로 한 영화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비가 어떻게 내리고, 어떻게 보여주었으며, 하필 그때 왜 비가 내려야 했는지 탐색한 추적의 기록이다. 예컨대 비 내리는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는지, 비는 어떤 정서를 담아내는지, 비 오는 장면 한 쇼트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고가 더해졌는지, 혹은 어떤 감독은 왜 영화마다 비 내리는 장면을 넣는지 등을 망라한다”는 말 그대로다. 비 오는 장면 말고도 전체 영화 내용과 영화 주변의 사람과 작업까지 정성스레 소개하는 모습에서 영화 마니아의 안목이 느껴진다. 책을 읽은 것을 계기로, 소개된 많은 영화 중에 (2002)과 (201..

감상글(책) 2023.10.14

<소설> 모모

미하엘 엔데(한미희 역), 『모모』, 비룡소, 1999. 『모모』는 1970년 탄생한 책이다. 소설 속 모모는 폐허가 된 원형극장에 사는 고아 소녀다. 미하엘 엔데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끝없는 이야기』의 주인공 바스티안도 어머니 없이 외로움 속에 자라는 아이다. 다만 모모는 친구의 따돌림으로 괴로워하던 바스티안과 다르게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모모는 원형극장에서 친구들을 많이 사귄다. 친구들이 모모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얘기를 잘 들어주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을 말을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며 서술자는 모모의 재주를 특별한 것으로 여긴다. 원형극장을 찾는 많은 친구들 중에서도 도로 청소부 베포와 관광 안내원 기기는 더 각별한 친구다. 베포는 말이 더디..

감상글(책) 2023.09.14

<소설>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용경식), 『자기 앞의 생』, 문학동네, 2003. - 에밀 아자르는 『자기 앞의 생』으로 1975년 공쿠르 상을 받는다. 1956년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받은 로맹 가리와 동일 인물인 것은 로맹 가리 사후 유서에서 밝혀졌다. 에밀 아자르만 인정하고 로맹가리를 부정했던 일부 평론가들이 무색해졌을 법하다. 1978년 발표된 노래 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인 박철홍이 곡을 만들었는데 병상에서 읽은 『자기 앞의 생』이 노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대학교의 김만수가 가사와 곡을 받아서 일부 개사한 것으로 보인다. 개사 과정에 “모모는 말라비틀어진 눈물자국이다”라는 구절이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곗바늘이다”는 구절로 바뀌었다. 이는 미하엘 엔데의 『모모』의 영향이 씐 듯한 인상을 받는다..

감상글(책) 2023.09.03

<에세이> 풍경의 비밀

송재학, 『풍경의 비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 한 번 읽었던 책은 거의 안 읽게 되지만 십여 년 전에 읽었던 송재학 시인의 산문집 『풍경의 비밀』을 다시 읽었다. 그때도 책을 읽고 감상글을 짧게 남겼다. 영천이 고향인 시인의 소싯적 이야기, 주변 시인과 시 이야기, 여행을 통해서 간직하게 된 단상과 내면 풍경을 접하면서 작가와 소통하는 잔잔한 기쁨이 있었다고 시작되는 감상글이다. ‘풍경은 비밀을 만들지 않지만 시간과 바람과 사람이 무수하게 쌓이고 지나면서 비밀 아닌 풍경도 없게 된다’고 나름 마무리 멘트까지 그럴듯하게 적어 놓았다. 시인이 언급한 고향 영천 이야기도 혼자 읽기 아까워 다시 옮겨 본다. 중고등학교를 대구에서 나온 시인은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영천을 찾게 되더라는 말끝에 이렇게..

감상글(책) 2023.08.16

<소설> 핀셋과 물고기

문서정, 『핀셋과 물고기』, 도서출판 강, 2023. - 여덟 편의 단편이 모인 소설집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상당수는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또는 자신이 한 일에 비해서 훨씬 과중하거나 아주 부당하게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다. 그러한 처지에 몰린 인물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게 하고 같이 아파하면서 종국에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작가의 역량일 것이다. 여덟 편 중 도 글을 읽고 난 뒤의 여운이 오래간다. 생선장수로 오남매를 키운 어머니. 늦게 얻어서 인생이 꼬이기만 하던 막내 외에는 어머니를 자주 찾지 못한다.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임종한다. 장례를 치른 뒤 세 자매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이상 증세를 똑같이 느낀 걸 알게 된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간지럽고 시린 통증을 동반하면서 ..

감상글(책) 2023.08.13

비와 빗물, 습작을 위한 아포칼립스 / 정훈

비와 빗물, 습작을 위한 아포칼립스 / 정훈 태초부터 있으라, 있으라 명령했던 말씀도 저 눈물이 스미는 쓰라림을 창조하진 않았겠다. 저, 저 시큰한 눈물 가락이 모든 통곡의 시초였겠다 벽 속의 창에서 흐느적거리는 저, 스스로 태우지 못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말씀 또한 모든 창조의 씨앗이었겠다 락스를 파는 소아마비 장애자가 포장마차에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막무가내로 팔아달라고 조른다 다음에 사지요, 다음에 사지요, 말하는 포차 주인에게 달려들 듯 몸을 자꾸 흘러만 내린다 저, 저어언에도, 다, 다아, 다엄에, 산다꼬 해짜나요오.. 땅에 완전히 눌러앉아 붙어 말라버린 자국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새들반점』, 함향, 2022. 감상 - 아포칼립스(Apocalypse)는 파멸, 종말, 대재앙의 사전적 의미를 갖고..

감상글(책) 2023.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