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550

<에세이>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전영애,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문학동네, 2021. - 내겐 독일 문학 번역자로 우선 기억되는 저자의 이번 책을 읽으니 저자에 대한 궁금증이 더 생긴다. 마침 유튜브에 이 올라와 있어서 흥미롭게 시청했다. 영상은 책 읽기 전이든 후든 아무 때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는 괴테의 시구에서 제목을 빌린 책이다. 저자가 운영하는 여백 서원, 그 뒷길엔 괴테의 시가 푯말을 대신하고 있고 그 꼭대기 어디쯤에 시비가 있다. 시비엔 “시간이 나의 재산/ 내 경작지는 시간”이란 시구가 적혀 있다. 저자는 젊은이들이 시간이란 어마어마한 상속분을 마음껏 경작하기를 빌어준다. 『파우스트』를 60년 동안 썼던 괴테가 바로 그런 사람임을 얘기한다. 소개한 괴테의 여러 시구 중에 “나를 ..

감상글(책) 2023.04.08

<소설> 해리 미용실의 네버앤딩 스토리

박현숙, 『해리 미용실의 네버엔딩 스토리』, 자음과모음, 2014. - 언젠가 딸아이에게 선물로 사준 책을, 딸은 바로 읽지 않고 얼마쯤 묵혀 두었다가 읽고는 다시 내게 내밀었다. 내가 읽지 않은 걸 알고 재밌다며 건넨 것인데 나 또한 얼마쯤 묵혀 두었다가 뒤늦게 읽는다. 재밌다. 중3 나이쯤 되는, 주인공 태산이는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사고로 돌아가신다. 아버지의 유품 상자엔 사진 한 장이 나온다. 해리 미용실 간판을 단 사진 뒷면, 태산이한테 그곳 미용실을 찾아가라는 당부가 한 줄 적혀 있다. 사진 한 장은 슬픔 속에서 여행 기분을 내고 모험 기분을 내는 단초가 되고, 해리 미용실의 정체는 조금씩 비밀을 벗기 시작한다. 소설 제목으로 차용된 (김태원 작사 작곡, 부활 노래)의 말뜻 그대로 이야기가..

감상글(책) 2023.04.01

<소설> 통도사 가는 길

조성기, 『통도사 가는 길』, 민음사, 1996. 조성기 작가의 소설집에서 단편 「통도사 가는 길」과 「불일폭포」는 실제 장소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인물에 얽힌 사연들의 실마리를 좇거나 수습하면서 인물의 뒤를 따르는 여정은 퍽 흥미롭다. 표제작이기도 한 「통도사 가는 길」의 여정과 사건을 메모해 본다. 사내는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굴원 시집 『초사』를 가방에 넣고 대구행 고속버스를 탄다. 대구터미널 인근 여관에서 일박하면서 방음이 안 되는 방에서 「반야심경」과 『불의 정신분석학』을 오가며 무촉과 감촉에 대한 화두를 품는다. 이튿날 사내는 동대구역에서 삼랑진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삼랑진역은 이십구 년 전 아버지가 교원노조일로 수갑을 찬 채 부산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갈 때 어머니가 여기까지 따라왔다가 남..

감상글(책) 2023.03.08

<에세이> 후끈밤 낭독회

추선미, 『후끈밤 낭독회』, 싱클레어, 2022. - 인디 가수 ‘경주페터’는 경주 불국사 인근에서 문화 공간인 신촌서당을 운영하고, 책의 저자이기도 한 아내는 그 옆의 골방책방을 운영한다. 이 공간에서 독립출판, 낭독회,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부부가 함께 기획하고 진행한다. 후끈밤 낭독회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을 낭독하는 모임인데 이때 아내가 낭독했던 내용을 부부가 함께 책으로 엮은 것으로 보인다. 책의 처음 부분은 경주에 내려와서 키우던 두 아이 이야기가 많다. 아이가 바깥 체험을 하고 결과물에 뿌듯해하는 걸 보고 그렇게 “한발씩 너의 것을 찾아가렴. 조금씩 덜 돌아보면서”라며 아이를 응원하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인 를 큰아이와 함께 보면서 영..

감상글(책) 2023.03.04

<에세이> 계속 가보겠습니다

임은정, 『계속 가보겠습니다』, 메디치, 2022. - 2012년 9월, 박형규 목사 대통령 긴급조치위반 등 과거사 재심 사건이 있었다. 박형규 목사는 1974년 민청학련의 배후로 몰려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10개월 만에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바 있다. 과거사 재심 사건을 맡은 임은정 검사는 대통령긴급조치 1호, 4호가 헌법에 위반된 무효 법령이란 이유로 검사 논고문에서 무죄를 선고해줄 것을 재판부에 청한다. 이전에 무죄가 확실시 되는 사안에 대해선 재판관이 법과 원칙에 따라 처분해달라는 백지 구형이 관례였으나 임 검사는 이를 깨고 무죄 구형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 과거사를 반성하는 내용의 논고문은 상급자나 공안통 검사의 질책을 불러오고 빨갱이 검사라는 이름도 떠돌게 된다. 같은 해 12월, 임 검사..

감상글(책) 2023.03.01

<동화> 강태풍 실종 사건

박채현(김기린 그림), 『강태풍 실종 사건』, 우리교육, 2023. - 『강태풍 실종 사건』은 박채현 동화작가의 세 번째 동화책이다. 동화 중 가장 마음을 들뜨게 하는 건 모험 동화다. 모험은 그 자체로 신나기도 하지만, 모험을 통해서 동화 속 주인공은 이전보다 한층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성장은 알게 모르게 독자의 성장을 견인한다. 동화 속 강태풍은 어머니와 갈등관계다. 강태풍에게 어머니는 좋아하는 게임을 막는 사람이니까. 강태풍은 밖에서도 고양이 밥을 발로 차고,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말썽쟁이기도 하다. 그런 강태풍이 쥐똥나무 울타리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이 세상에서 다른 차원으로, 현실에서 판타지로 넘어가는 장면이다. 그 과정에 몸이 작아지며 동물의 말을 알아듣게 된다는 설정은 셀마 ..

감상글(책) 2023.02.21

<소설>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나무옆의자, 2021. - 노숙자(老宿者)는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란 뜻이지만 집이 없어서 생긴 문제임을 더 뚜렷이 보여주는 홈리스(homeless)란 말을 쓰는 횟수가 늘고 있다.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고 암만 애를 써도 집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그런 수고로부터 자기를 놓아주는 노숙자의 길이 있을 것이고, 가족관계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대립이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자포자기식으로 노숙자의 길로 들어선 경우도 있어 보인다. 스스로 집을 뛰쳐나간 자발적인 파산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 또한 사회현실이나 집 안팎의 무거운 공기를 감당하지 못한 이유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노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사가 다 다를 것이고, 이들을 보는 시선도 그만큼 다르다. 늦은 밤,..

감상글(책) 2023.02.04

<산문>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 『헌책방 기담 수집가』, 프시케의숲, 2021. -윤성근 작가는 서울 은평구에 있다는 서점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이다. 절판된 책을 찾는 헌책방 손님들에게 그 책을 찾아주는 일은 책방 주인의 남다른 능력치다. 손님으로부터 절판된 책을 찾는 이유를 듣게 되고 그 사연에 흥미를 가진 주인은 절판 책을 구해주기 전에 사연을 먼저 묻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사연이 쌓이게 되고 이번 책으로 묶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이 실화일까 소설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판 책을 찾는 기이한 사연들이 연속되는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은 소설에 가깝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생각을 예상했는지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소설이 아니라고 했다. 아예, 서문 앞엔 함정을 파듯이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인용해두기까지 ..

감상글(책) 2023.02.01

<산문> 나를 바다를 닮아서

반수연, 『나는 바다를 닮아서』, 교유서가, 2022. - 산속 생활 이야기를 다룬 방송 ‘자연인’을 보면,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엔 출연자가 어찌 살았는지, 무슨 이유로 산에 들어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속사정을 털어놓는 시간이 매회 이어진다. 산속 생활의 패턴이나 자연인의 고백이 식상하다는 평도 있지만 우연찮게 접한, 자연인의 삶에 눈과 귀뿐만 아니라 마음을 내줄 때도 있다. 이번에 읽은 산문집 『나는 바다를 닮아서』를 일독한 기분도 그렇다. 책에 빠져들어 잘 익은 이야기를 좋게 듣는 기분이다. 반수연 작가는 통영 서호시장에서 성장해서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 갔는데 산문집에서 그런 내력과 사연을 살펴볼 수 있다. 성장배경이 된 서호시장 이야기는 작가의 첫 소설집 『통영』을 읽게 되면 다시 펴 ..

감상글(책) 2023.01.20

<만화> 너를 그리며

만화 『너를 그리며』(최인선 글 그림), INSUNNY, 2022. - 아름다운 만화책 한 권이 내게 닿았다. 서로 품을 내고 품을 갚는 품앗이 비슷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나온 책이다. 품을 살 때 미니 달력은 선택 항목에 있었고 그 자체로 귀한 선물로 되었다. 그런데 항목에 없었던, 그림 있는 작가의 사인이 퍽 정성스러워 이 또한 선물이다. 품을 산 모든 벗들에게 작가 스스로 품을 더 내서 그림 사인을 보내는 마음이 소중하게 와 닿는다. 다른 선물도 좋지만 진짜 선물은 만화책이다. 만화 속 중학교 아이는 어느 날 집 앞의 은행나무가 보내는 따스한 기운을 알아차린다. 그날 이후 은행나무 정령과 아이의 내밀한 교감은 시작된다. 이사와 함께 이별은 찾아오고 뒷날의 재회는 아프고 뭉클하다. 한 컷 한 컷의 ..

감상글(책) 2023.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