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724

하일시초 / 신동집

하일시초(夏日詩抄) / 신동집 여름도 방학철 오전 한때를 서창(西窓)에 다붙은 포도시렁 아래 고흐의 걸상을 내다놓고 한동안 시름없이 잠기는 일이 있다. 댓평 될까마는 땅그늘이지만 오전엔 집에서도 기중 시원한 곳이다. 담장과 시렁 사이로 열린 하늘 조각이 또한 유난히 맑은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여름날의 내 영혼의 빛깔이랄까. 이 파란 하늘 조각을 무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덧 허공엔 빈 조롱이 하나 흔들리듯 말며 시름없이 걸려 있다. 이따금 한두 마리 이승의 새는 날아가도 그들 눈에 이 조롱은 보일 리 만무하리라. 조롱 속에 담긴 내 마흔의 여름날들, 생각은 하염없이 물레실을 푼다. 어느덧 뙤약빛도 발밑으로 밀리고 시렁에도 후끈한 김이 서리면 다른 데로 나는 또 그늘을 옮겨야 한다. 그러나 조롱은 매양..

감상글(시) 2023.10.22

<영화 에세이> 호우시절

백정우, 『호우시절』, 피서산장, 2022.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6. - 『호우시절』은 백정우 영화평론가의 네 번째 영화 이야기로서 비를 소재로 한 영화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비가 어떻게 내리고, 어떻게 보여주었으며, 하필 그때 왜 비가 내려야 했는지 탐색한 추적의 기록이다. 예컨대 비 내리는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는지, 비는 어떤 정서를 담아내는지, 비 오는 장면 한 쇼트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고가 더해졌는지, 혹은 어떤 감독은 왜 영화마다 비 내리는 장면을 넣는지 등을 망라한다”는 말 그대로다. 비 오는 장면 말고도 전체 영화 내용과 영화 주변의 사람과 작업까지 정성스레 소개하는 모습에서 영화 마니아의 안목이 느껴진다. 책을 읽은 것을 계기로, 소개된 많은 영화 중에 (2002)과 (201..

감상글(책) 2023.10.14

독작 / 나석중

독작(獨酌) / 나석중 목련은 어떤 지극한 마음으로 꽃을 향해 가는지 꼿꼿이 세운 그 꽃봉오리 끝으로 나 속절없이 당신에게 안부를 적고 싶네 텁텁한 막걸리 한 병이면 당신을 사흘 견디네 돼지고기 한 근 끊어 김치찌개를 끓일 때 문득 당신이 찾아오네 그러나 아주 가끔 하루 한 잔으로 족하네 당신은 팔부 능선쯤 차오를 때 제일이네 외로움도 아껴야 해 나 외로움을 너무 낭비하는 게 아닌지 넉넉히 차오른 당신을 굽어보는 동안 어느새 낮달처럼 떠오르는 당신은 웃는지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달래주는 오늘 당신은 나의 반주라네 -시선집 『노루귀』,도서출판b,2023. / 『목마른 돌』(2019) 감상 : 독작이란 제목의 시가 많은 줄 안다. 술을 하든 안 하든 독작이란 제목 자체가 삶의 한 구경(究竟)에 가 닿아 ..

감상글(시) 2023.10.01